문화

이종석 고택…조선 말 거부의 여름 별장

입력 2021/04/15 15:27
수정 2021/04/20 10:51
서울 북쪽 동네인 성북동. 돈 많고 지체 높은 이들의 저택 단지로 강북에서는 평창동, 한남동과 함께 부자 동네로 소문난 곳이다.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니 당연히 풍수적 조건이 좋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성북동은 성북천의 물세뿐 아니라 동네를 감싸는 산세가 유난히 좋고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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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에서 성북동으로 이어지는 동네에서 문인의 자취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수연산방壽硯山房’이 대표적이다. 상허 이태준의 고택인 수연산방은 일제 강점기에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이태준을 비롯해 김기림, 정지용, 이상, 이효석, 박태원, 김유정 등이 모여 시와 문학의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 곳이다. 이 수연산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종석 고택이 있다.


지금은 덕수교회의 수련원으로 쓰이지만, 수연산방을 찾았던 문인들을 이곳 ‘일관정一觀亭’ 현판이 걸린 누마루에서도 문학을 논했다. 누마루는 다락처럼 높게 만든 곳이다. 양반집 사랑채에 주로 설치하는데 바닥에는 돌기둥을 세워 다른 건물보다 높게 위치시킨다. 그것은 주변의 경치를 굽어보는 데도 도움이 되고 집 주인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고택의 주인인 이종석은 조선 말 마포에서 새우젓 등 젓갈 장사로 큰돈을 번 ‘호상豪商’이다. 훗날 보인학원을 설립한 그는 한강에서 각 지방에서 올라는 오는 목재,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양곡과 해산물 등의 장사로 당시 마포에서는 상선을 가장 많이 보유한 부자였다. 이종석은 성북동에 여름 별장을 소유했다. 그것이 바로 이종석 별장 고택이다.

이 고택은 이종석이 왕족의 집을 매입한 것이라는 일설도 있지만 고택의 건축 연도는 1900년대로 추정된다. 특히 고택은 조선 말기 돈을 번 상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가옥으로 그 가치가 있다. 안채로 드나드는 일각 대문, 중문과 행랑 마당의 우물가, 집터 주위의 수목, 마당의 소나무가 어울려 예스런 맛을 지닌 별장 건축의 면모를 갖춘 가옥이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보통의 조선 시대 양반집 공간은 신분과 집안 사람들의 역할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와 행랑 마당이 나오고 담장이 또 하나의 경계를 이룬다. 담장에 붙은 중문을 통과하면 사랑채가 있다. 이 사랑채를 통과해야 비로소 안채가 나오는 형태다. 하지만 이종석 고택은 공간 구성을 다르게 했다. 행랑채는 특이하게도 ‘ㄱ’자 형으로 일반적인 가옥 구성이다. 일각 대문을 지나면 행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중심은 당연 누마루다. 누마루를 중심으로 일종의 안방과 부엌이 같은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누마루는 전면 한 칸, 측면 세 칸으로 사면이 창으로 되어 있어 풍경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누마루에서 고담준론을 나누고 실컷 풍경을 구경하면 딱히 몸을 일으켜 나갈 것도 없이 누마루에서 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구조다. 그러다 쉬고 싶으면 안방에서 몸을 뉘이면 되는 것이다. 누마루에서는 성북천의 흐름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커다란 화강석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건축물은 누각과 창살, 처마 등에 돈과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집과 바깥의 경계를 나누는 담들 역시 섬세하다. 벽돌 가운데 십자 모양의 일종의 바람구멍을 낸, 구슬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꽃문양의 담이라는 뜻의 회색 벽돌 ‘영롱담’은 아름답다. 가옥 뒤편에는 새로 마련한 장독대도 있고, 집 뒤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잘 어우러져 있다. 본래 지금의 주차장 자리에 연당과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성북동아름다운사람들 홈페이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75호 (21.04.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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