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1년만에 완성한 백두대간…그 속에 사람 있다

입력 2021/05/04 16:55
수정 2021/05/04 17:24
한국 리얼리즘 대표 화가
황재형 개인전 '회천'


미대 졸업 후 광부가 되어
열악한 탄광촌 노동자 그려

머리카락으로 만든 초상화
흑연으로 그린 호수 풍경화
40년 예술성취 담은 65점 펼쳐

"절망속에도 삶은 계속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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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형의 1993~2004년작 `백두대간`.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가로 5m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에 백두대간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다. 눈이 내렸는데 밤낮이 모호한 풍경화다. 11년간 여러 차례 관찰하고 수없이 덧칠해 완성했기 때문이다. 폭설이 내린 어느날 밤에 본 풍경을 그리기 위해 다음날 아침에 그 장소로 갔으나 어제 모습은 사라지고 고요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시간의 모습을 중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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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리얼리즘 미술 대표 작가 황재형(69·사진)이 1993년 시작해 2004년 완성한 대작 '백두대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인전 '회천(回天)'에 걸렸다. 대상의 본질을 담기 위해 그가 쏟아부은 열정과 끈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명 '회천'은 형세나 국면을 바꿔 쇠퇴한 세력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작가는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배우고, 배운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에게 배우는 전복이야 말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앙대 회화과 출신으로 민중미술을 지향한 그는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기 위해 1982년 가을 강원도에 정착해 광부가 됐다. 그 후 3년간 태백, 삼척, 정선 등의 탄광 노동자들 일상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1981년작 '황지330'은 그 시작을 알리는 그림이다. 1980년 황지탄광 매몰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낡은 작업복에 새겨진 명찰 '황지330'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숫자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서글픈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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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형의 1985년작 `식사`.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좁은 갱도 안 점심 시간을 그린 1985년작 '식사'는 탄광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동료의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하면서 석탄가루가 내려앉은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짠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갱도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작가는 "그때 기억이 삶의 진실이자 연민"이라고 했다. 결막염이 심해져 광부를 그만둔 작가는 쇠락해가는 탄광촌 모습을 나이프로 거칠게 그려낸다.


흙과 물감을 섞어 황톳빛 능선과 계곡을 담은 작품 '어머니'(2005)는 풍경화이지만 사람의 흔적이 담겼다고 한다. 작가는 "인간이 사라진 풍경에도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산 아래 탄광촌에는 오랜 세월 노동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석탄가루와 오물이 흐르는 탄천이 석양에 노랗게 물든 2008년작 '작은 탄천의 노을'은 작품세계 전환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후 광부들의 노동현장을 넘어 주변 풍경과 보편적인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상화 '아버지의 자리'(2011~2013)는 진폐증에 걸려 요양원에 있는 늙은 광부를 극사실적으로 그렸지만, 눈물을 머금은 그의 눈동자와 주름은 누군가의 아버지 모습 같다.

2010년 이후에는 머리카락과 흑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사람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믿는 머리카락을 지인들에게서 얻어 화면을 채웠다. 2017년작 '드러난 얼굴'은 2002년 유화 '광부초상'을 머리카락으로 다시 풀어낸 작업이다. 머리카락으로 선과 면을 표현하려면 유화보다 몇 배의 작업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흑연으로 러시아 바이칼호수 심연을 그린 '알혼섬'(2016)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걸작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착하기에 성실할 수밖에 없고 속이지 못해 더 힘든 이웃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낚시 미끼를 12m로 확대한 신작 조형물을 비롯해 40년간 예술 성취를 담은 작품 65점이 펼쳐진 전시는 오는 8월 22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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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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