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Citylife 제789호 (21.07.27) BOOK

입력 2021/07/21 11:34
▶미국인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것들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701193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앵거스 디턴, 앤 케이스 지음 / 이진원 옮김 / 한국경제신문 펴냄

경제가 발전하고 기술혁신이 일어날수록 기대수명은 늘어난다. 인류 역사가 증명해온 이 상식을 거스르는 기이한 미스터리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 내 백인 중 45세에서 54세 사이에 해당하는 백인 연령층의 사망률이 높아진 것이다. 보통 이 시기는 생활과 소득 등에서 가장 안정적인 시기인데 말이다.

60만 명. 이 숫자는 1999년부터 2017년 사이에 미국 중년 백인층의 사망률에 돌연 반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즉 20세기 들어 멈춤 없이 낮아지던 사망률의 흐름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죽지 않았을 사람의 수다.


2018년에만 사망률 반전으로 15만8000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매일 만석으로 비행 중인 보잉 737 맥스 여객기 세 대가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것과 같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과 보건경제학의 귄위자 앤 케이스 부부는 이처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죽음에 ‘절망사(絶望死)’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는 저소득·저학력 백인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살,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죽음이다. 경제학의 두 거장은 오늘날 미국을 강타한 절망사라는 비극, 어쩌면 머지않아 다른 나라와 다른 세대의 문제가 될지 모르는 전염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지난 30년 동안 교육을 덜 받은 백인들을 덮친 유행병은 50년 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덮친 병이다. 많은 면에서 인종 간 격차가 줄어들고 있지만 적어도 교육 계급만을 생각한다면 계급의 분화가 확대되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현재 미국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들의 사연은 『힐빌리의 노래』에 등장하는 미국 노동계층의 궤적과 꼭 닮아 있다.


소득과 교육 수준이 낮으며, 생산직에 종사하면서 제조업의 부흥과 함께 좋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제조업 경제가 무너지면서 생활의 축이 무너진 사람들. 이들의 삶의 무대는 쇠락한 제조업 중심 도시인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점은 최근 한국에서도 화두가 된 ‘능력주의’다.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는 상황에서 성공도 실패도 전적으로 개인 탓으로 여기는 능력주의 문화와도 이 절망사는 관련이 있다. 낙오자는 실패를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 부족, 능력 부족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사회에서 “세상은 교육을 더 받은 사람들과 덜 받은 사람들 사이의 세상으로 나눠졌다”라고 할 만큼 교육 격차와 교육 수준에 따라 얻게 되는 혜택의 격차는 점점 커져가기만 한다. 교육 기회를 빼앗긴 이들을 위한 안전망도 빈약한 사회에서 절망사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가 말하는 ‘절망사’에서 ‘절망’은 물질적 박탈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훨씬 더 나쁘다”라고 말한다.

비극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 이 책에서 제안하는 대안은 크게 일자리 정책, 공공 의료 서비스 확대, 약물 처방 기준 강화, 정경유착 차단, 최저임금 인상, 임금보조금 도입 등이다. 한마디로 ‘더 나은 자본주의’가 해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페이스북·구글 같은 독과점 기업이 개인 정보를 활용할 때 비용을 내도록 하고, 기업 독과점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우리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히며 “우리는 경쟁과 자유시장이 가진 힘을 믿는다”고 말한다. 문제는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 원칙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이라는 것이다. 두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불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어서 문제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 제도에 대해서는 재원 마련과 우선순위 문제 그리고 일과 직업을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인식을 이유로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

이미 미국은 트럼프 이후의 세계를 살고 있지만, 트럼프 시대를 탄생시킨 동력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분노한 백인들에 대한 보고서로 읽는 것이다.

책의 전반에 걸쳐 주장하는 것은 절망사라는 유행병이 아직 저학력·저소득 백인층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 손쓰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지 모른다는 경고다. “이 파국에서 예외인 나라는 없다”라고 단언하는 앵거스 디턴의 경고를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89호 (21.07.27)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