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엄마도 아내도 아닌 오로지 '나'로 존재한다

입력 2021/07/27 17:05
수정 2021/07/27 19:07
남달랐던 1933년생 최유정
주체적인 삶 모습 보여줘
"인생 다룬 성숙한 소설"
◆ 제22회 이효석 문학상 / 최종심 진출작 ④ 은희경 '아가씨 유정도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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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세대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가졌던 적이 드물었다. 누구 엄마, 어디 댁, 누구 아내 등 타인과 관계 속에서 정의되곤 했다. 은희경 '아가씨 유정도 하지'는 여든두 살의 여성 '최유정'을,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 그대로 소리 내어 불러준다. 개인으로 호명된 유정의 오색찬란한 삶은 꽃으로 피어나 독자에게 가닿는다.

1933년생 최유정은 젊은 시절부터 남달랐다. 희생과 자애라는 동시대 여성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꽃을 사고 계절별로 식기를 구비하는 '작은 사치'를 부리는가 하면, 아들 가방 사주려고 모은 돈은 여성용 수영복을 사는 데 썼다. 그럼에도 밉지만은 않은 건 무책임한 엄마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곤궁한 생활 등에서 도망가고 싶다면서도 아들딸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으며, 홀몸으로 끝까지 양육했다.

나이 들어선 손 벌리지 않고 삶을 거뜬히 경영했다. 남편이 남긴 연금과 아파트 월세 수입으로 살림을 꾸리고, 벽에 못 박기 등 자질구레한 일은 사람을 사서 해결했다. 명절과 기념일을 빼면 가족을 만나는 날도 많지 않았다. 그 대신 환갑을 넘어 딴 운전면허로 친구들과 드라이브를 나갔다. 이번에 막내아들인 '나'의 출장을 따라 건너간 미국에서도 숙박을 제외하곤 개별적으로 행동한다. 뉴욕에서 사귄 청년 '에이미'와 함께 주점, 피자가게 등을 순회하며 여행을 즐긴다. 각종 피자를 맛보며 행복해하는 최유정, 꽃을 받고 기뻐하는 최유정, 60년 전 연인을 마음 한편에 간직하고 있는 최유정까지. '유별난 어머니'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또 다른 '최유정들'을 발견하며 깨닫는다. "개인의 삶은 각자에게 유구한 역사이며, 어머니의 서사는 그 누구의 서사와도 다른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코니아일랜드 해변을 찾은 유정이 펄펄 눈 내리는 가운데 노래하며 서사는 만개한다. "나의 유정한 사람과 걷고 싶다"고 연인이 일러준 그 해변에서, "울산의 아가씨 유정도 하지"라는 제 이름이 담긴 노래를 흥겹게 부르는 장면이 은희경의 발랄한 문장으로 그려진다.

작품은 '나'의 서사에도 유정만큼이나 비중을 두며 개인이라는 지위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중년 남성이자 아들이자 동양인인 '나'도 자기 역사에서 주인공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소설 구조로 보여준다. 아시아인을 깔보는 미국인과 토론하면서 '나'는 오롯이 자신으로 살았던 이에 대한 문장을 인용하며 응수한다. "항상 남성·여성이라든가 젊음·늙음 같은 전형적인 범주에 도전하고 전복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이 인간으로 하여금 제한적이고 위험을 회피하는 삶을 살도록 유도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정희 소설가는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다룬 성숙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김동식 문학평론가도 "나이 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물상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은희경은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로 등단했다.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 '새의 선물' 등을 썼다.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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