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소설가의 방…호텔 가득채운 문학의 향기

입력 2021/09/24 17:12
수정 2021/09/29 18:33
보안스테이, 객실 세곳을
유명작가 주제로 꾸며
자필 편지 등 이벤트로 인기

서울프린스호텔은 7년째
신진작가에 집필실 지원

호텔 배경 작품 잇따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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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일상을 떠나 기대하게 하는 비일상으로 나아가는 여행. 도착한 그곳이 만약 소설가의 방이라면?'

출판사 문학동네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호텔 '보안스테이'와 진행하는 '소설가의 방' 프로젝트는 이 행복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독자들을 위해 객실 세 곳을 각각 소설가 '강화길의 방' '백수린의 방' '최은영의 방'으로 꾸며 운영 중인데 다음달 31일까지인 이벤트 기간 내 상당수 날짜가 매진됐을 정도로 인기다.

'호캉스'가 대세가 된 코로나19 시기에 호텔이 다시금 문학의 산실로 떠오르고 있다. 독자는 여기에서 책을 읽고 작가의 자취를 좇는가 하면, 작가는 객실을 집필실로 지원받아 한껏 창작에 힘쓴다. 아예 호텔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잇따라 번역·출간됐다.


보안스테이 소설가의 방에 들어서면 각 방 주인들의 편지가 먼저 여행객들을 반긴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안정을 찾으려는 손님을 위해 작가들이 직접 전하는 위로다. 더불어 소설 속 문장들이 적힌 문고리 카드, 종이 받침대, 오프너, 책갈피, 플레이리스트 등이 웰컴 키트로 제공된다. 객실 창문과 거울 등 눈이 닿는 곳곳마다 아름다운 문구들이 종이책과 함께 수놓여 있어 독자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갈 때까지 소설과 작가를 감각할 수 있다. 우상욱 문학동네 기획마케팅부 대리는 "팬데믹으로 여행을 떠나기 힘든 요즘 애독가들에게 치유와 색다른 경험을 전달하고자 당대에 주목받는 세 명 소설가들을 주제로 방을 꾸몄다"고 설명했다.

서울 중구 명동의 서울프린스호텔에도 '소설가의 방'이 있다. 이 방 투숙객은 작가들이다. 서울프린스호텔이 메세나 경영 차원에서 7년째 신진 소설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빌려주고 있다. 17㎡(5평)짜리 방 한 칸과 세 끼 식사 등을 최장 6주까지 지원한다. 등단한 지 10년 이내이고 이듬해까지 소설 발간 계획을 가진 작가들 지원을 받아 입주자를 선정한다.


우다영·장류진·김초엽을 비롯해 2014년부터 작년까지 73명 작가가 여기서 소설을 써 내려갔다. 올해는 장강명·정진영 등 8명 소설가들이 차례로 머물고 있다. 특히 이번엔 17명 안팎으로 지원하던 예년과 달리 27명 지원자들이 몰려 심사에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외국도 이런 제도가 있다.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1967년부터 시인·소설·극작가 등 문인들을 위해 운영해오고 있는 '국제창작프로그램'(IWP)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서 뽑힌 30여 명 작가들이 최장 10주간 대학 내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에서 지내며 집필에 집중할 수 있다. 강연, 세미나, 낭독회, 토론회 등 문화교류 기회도 많다.

한국에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해 지원할 수 있고 황동규·최인훈·황지우·한강 등 여러 문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거쳤다. 올해는 소설가 김혜나가 뽑혀 10월 초부터 11월 30일까지 체류할 예정이다. 그는 "세계 20~30개국 작가들과 교유하며 세계 문학의 흐름을 발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소설 소재와 주제를 정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호텔이 중심이 되는 작품들도 활발히 나온다. 지난달 출간된 강화길 신작 '대불호텔의 유령'은 국내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이 무대다. 1950년대 귀신 들린 건물 '대불호텔'에 이끌리듯 모여든 4인이 겪는 무서운 체험을 그린다.


작가는 인천 중앙동에 복원된 대불호텔 전시관에 실제로 놀러 갔다 영감을 얻고 이 책을 썼다. 프랑스 소설가 마리 르도네의 '장엄호텔'은 24년 만에 이달 초 새로 번역 출간됐다. 할머니가 죽고 장엄호텔의 주인이 된 '나'가 인적이 끊긴 늪지대에서 무너져가는 호텔을 지키며 살아가는 얘기다.

왜 이렇게도 많은 작가들의 발길이 호텔로 향할까.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공간이 주는 자극을 도심 한복판에서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대학생 때 호텔에 머무르며 신춘문예를 준비했던 기억을 담은 칼럼 '호텔프린스의 추억'을 쓴 윤고은 소설가는 매일경제와 통화에서 "내 것이 아닌 공간에 머무르는 이방인의 불편함을 좋아한다"며 "호텔에 있을 때 나는 밥·빨래·청소 등 일상의 공간에서 분리된다"고 했다. 소설가 안보윤은 "호텔방은 나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내 것이 하나도 없는 공간"이라며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책상을 보면서 내가 뭔가를 기록하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전 세계 도처를 여행하며 책을 쓴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호텔을 사랑한 작가, 호텔이 사랑한 작가로 유명하다. 헤밍웨이가 1930년대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1장을 쓴 것으로 알려진 쿠바 암보스 문도스 호텔은 '헤밍웨이 호텔'로도 불린다. 그가 묵었던 511호 객실은 현재 작품과 사진 등의 전시관으로 쓰인다. 이 밖에 파리 리츠 호텔, 파리 메리어트 호텔, 케냐 헤밍웨이 나이로비 호텔 등 인연이 있는 호텔들이 '헤밍웨이 바' '헤밍웨이 룸'을 만들어 작가를 기리고 있다.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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