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대와 역사의 관찰자·참여자, 건축가 이성관(上)

입력 2021/09/25 06:01
[효효 아키텍트-99] 늦은 유학을 포함해 6년여 미국 뉴욕 HOK에서의 실무 후 귀국한 1988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기 활황세, 토지초과이득세 정책으로 유휴 용지에 건물을 짓는 붐이 한창이었다. 1989년 종합건축사무소 개소 수개월 전, 용산 전쟁기념관(The War Memorial Of Korea) 공모에 '건원건축'의 건축가와 공동 응모했다. 6등인 입선작에만 들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방 출장 중에 전화로 당선 통보를 받은 건축사사무소 한울건축 이성관(李星觀·1948~ )은 순간 멍했다. 막 사무소를 개소했기에 자체 조직을 갖추는 4~5년 뒤에나 대형 프로젝트에 본격 도전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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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에서 본 주출입구와 캐노피 / 사진제공 = 한울건축 이성관 대표

그는 자신이 죽든가 큰 병을 얻을 것이라는 예감이 왔다.


이후 설계 1년을 포함해 시공이 진행되는 4년 반 동안 웃는 날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전쟁'이라는 단어를 접하거나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최선을 다했으나 힘들었던 날들이 기억에 떠오른다. 전쟁기념관은 당선 발표 후부터 온갖 논란에 휩싸였다.

'기념관' 앞에 '전쟁'이 붙음으로써 군사문화의 잔재라는 딱지가 붙었다. '군사정권에 협조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건축 비평이라는 명분으로 소위 87년 체제가 가라앉지 않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기저기서 공격이 들어왔다. 심지어 히틀러를 위해 일한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에 비교하기도 했다. 이들은 전쟁기념관을 처음부터 이데올로기라는 프레임으로 재단했다. 건축물을 보고 느끼려는 게 아니라 건축의 한 요소인 '광장은 이래야 된다'는 식의 주장도 등장했다.

실제 전쟁기념관은 노태우정부의 국책사업이었다. 전쟁기념관이 준공된 지 27년이 지난 만큼 기념관을 기획하고 설립·착공한 노태우정부의 성격을 살필 필요가 있다. 과연 전쟁기념관이 군사문화의 잔재였는지를 규정하려면 노태우정부는 군사정권이었고, 김영삼정부는 이전 정권과 단절한 문민정부여야 한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에서 촉발된 6월 민주항쟁은 집권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소위 6·29선언으로 마무리되었다. 수개월 후에는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과 '경제민주화'가 명기되었다. 노태우정부에 앞선 전두환정부는 박정희 대통령 궐위 시기에 12·12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을 수장으로 하는 특정 인맥의 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한 명백한 군사정권이었다.

노태우정부 임기 시절인 1990년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은 소위 3당 합당을 통해 차기 정권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향점이나 정강정책, 지역 기반이 달랐던 3당의 합당은 집권을 위한 정치공학이 최우선의 가치였다. 1992년 대선이 구체제를 전복했다고 보기 힘들며 '문민정부'는 정치적 레토릭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김영삼정부는 '대한민국 정통성 확립'을 내세우며 일제시대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건물을 해체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중앙청 건물을 두고 '보기도 싫다'는 식이었다.


이성관은 '공간은 범용성이 있다'면서, 일제 잔재라는 중앙청의 상징성을 역사박물관으로 용도 변경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전쟁기념관은 1990년 9월에 착공식을 가졌으나 건립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소요 예산의 과다와 급변하는 남북관계 및 주변 정세의 유동성' 등이 이유였다. 건립을 반대하는 여론은 기념관의 의의와 필요성, 전시 내용, 예산의 충당 방법, 전시물의 구입 방법과 내용, 공사 과정의 비리 의혹과 앞으로의 운영 등등이었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993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은 예정대로 전쟁기념관을 추진하라고 지시하였다. '전쟁기념관이 특정 목적으로 설계해 이미 완공 단계에 있어 설계 변경이 어렵고, 박물관으로 쓸 수 있는 구조로 돼 있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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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1994년 개관 당시 모습 / 사진제공 = 한울건축 이성관 대표

1994년 6월에 개관하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전쟁기념관' 친필 휘호탑(揮毫塔), 기념관 본관 현관 중앙 상부에 '護國殿堂'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가 걸렸다.

전쟁기념관 건립의 대표적인 반대론자인 정기용(1945~2011)은, "(박정희 시대를 포함한) 군사 통치 시대가 남긴 최후의 기념비"로 인식하였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 휴식하는 곳


지난 21일 추석날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잠깐의 비가 내린 뒤라 청명했고, 하늘은 높았다. 우측으로 남산을 뒤로한 기념관 자리는 '한강, 서울역, 이태원 방면으로 통하는 삼거리 땅'이라는 의미의 '삼각지'역에서 이태원 방면의 가로에서 진입했다.

기념관 정면의 계단을 올라 광장을 지나니 바람이 시원했다. 2시간여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념의 대상이 고대사로부터 한국전쟁 및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쟁과 군사 관련 내용이다. 컬렉션은 비행기, 소형 군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나 고대사 관련은 현대전인 한국전쟁과 비교하여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미 조선시대 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시대를 포함 앞시대의 유물은 멸실될 수밖에 없고, 분단이 80여 년 이어지면서 북한 지역의 유물을 포괄할 수 없어서이다. 전시 방식에 있어서도 흔히 보던 민속박물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전쟁기념관은 박제된 표본들만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아니다. 실내에는 호국추모실이, 실외 회랑(回廊)은 창군 이래 6·25 및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사한 국군, 경찰관, 유엔군 전사자 등 16만여 명의 이름을 새긴 전사자명비가 놓인 추모의 공간이기도 하다.

관람을 하다 보니 목이 말랐다. 야외 카페에 앉아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하고 싶었으나 그런 공간은 없었다.

기념관이 준공된 1994년 배호의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의 무대가 된 인근 고가가 철거되었다. 삼각지 일대는 1970년대까지도 인근 부대에서 귀국하는 미군들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업이 번창했고, 액자 집 또한 번성했다.

삼각지역과 교차하는 4호선 다음다음역이 국립중앙박물관이 자리 잡은 이촌역이다. 이촌동 일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서울역 방면 남영역 일대 후암동은 일명 문화주택이 많았던 곳이다. 용산 일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외국 군대 및 외국인들이 머물렀던 점령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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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과 전사자명비 / 사진제공 = 한울건축 이성관 대표

기념관 자리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군영으로, 해방 이후에는 육군본부로 사용되었다.


빈터에서 일상의 가치와는 반대인 전쟁, 죽음과 희생을 기념해야 했다. 이성관은 기념관이 들어선 터의 장소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드스케이프(hardscape)로 처리된 '중앙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과 수(水)공간의 설정은 일상(日常)의 공간에서 상징적이며 경건한 광장으로의 전이에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이성관 건축에서 물은 자연의 소리이며, 실상이며, 순환, 투영의 매개이다.

중앙 광장에서 건물의 주 현관까지 양쪽 회랑을 끼고 기념관 매스를 들어올려지게 투시하는 주축(主軸) 설정은 명쾌하다.

열주를 세워 직각의 회랑을 구성하였다. 열주는 공간을 정의하기 위한 장치이다. 경건함과 장엄함을 강조하기 위해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하였다. 수평과 수직의 조화이다. 조선 회화사 최고의 금자탑인 정선의 '금강전도'는 수평과 수직으로만 그려진 준법과 필획이 특징이지 않나.

건축가는 전쟁이 재발해서는 안되는 기원으로 자신이 품은 미학적 가치를 최대한 배제하고 담담하게 건축물을 남기려 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와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강렬한 구도와 무감각할 정도의 색채로 전쟁에서 인간의 광기를 각인시켰기 때문이지 않나.

현존하는 문명 도시 속 또 다른 작은 역사 도시인 전쟁기념관 건축의 메시지는 단순 구도와 무채색으로 강렬하게 드러난다. 건물을 한 권의 책으로 본 이성관은 외관은 책의 표지를 디자인하느냐와 흡사하다고 본다. 외피는 화강석(포천석)을 사용하였다.

대지면적 11만3265㎡, 건축면적 1만8835.9㎡, 연면적 18만4130.9㎡, 지하 2층~지상 4층의 건물로, 총 6개 실내 전시실과 옥외 전시실, 기타 부대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성관은 스스로 문약한 것을 싫어하는 무인 기질이 있다고 말한다. 조선조가 성리학에 치우쳐 문약해지면서 외국 군대의 침략을 허용했으나 민초들이 강토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공리공론보다는 실천이 앞서야 된다는 게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은 이 땅에서 일어났던 전쟁 실상에 대해 기록하고 평가하고 전시하는 곳이다. 이념에 경도되거나 추종하지 않았다. 국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부터 이 땅과 주변에서 우리 공동체에 반하는 전쟁과 저항의 사실을 기록하여 기억하자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국제전이었고, 한강을 둘러싼 서울 자체가 전쟁터였음에도 전쟁을 기억하고 기록한 곳이 없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파괴된 한강 인도교의 교각 한 부분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게 겐조(1913~2005)의 일본 히로시마 기념관(1955)은 원폭 투하 중심지가 잘 보이는 곳에 마련하지 않았나. 전쟁기념관은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야 하는 당위성의 발현 공간이다.

이성관은 영국 연방의 일원인 호주 여성 총독을 안내했던 기억이 새롭다. 서구의 상당수 국가들은 자신들이 참전했던 전쟁 전사자의 유해를 봉환하지 않고 현지에 안장한다. 전쟁기념관 영내에 기념비를 남기는 유엔 참전국들이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설계의 주된 개념은 매스에 앞선 진입부의 '과정적 공간(processional space)'이다. 과정적 공간은 우리 전통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석사 논문은 '우리 전통 건축의 외부 공간의 특징'이다. 국내외 어디서 무슨 프로젝트를 수행하든 늘 시간 속에서 공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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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전경 / 사진제공 = 한울건축 이성관 대표



전쟁기념관의 존재 이유는 항구적 평화에 있으며 전쟁의 이해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삶은 일상의 영역에 속해 있다. 전시 내용은 전쟁, 죽음, 기념, 비일상, 과거이기에 상이한 두 영역 간의 급작스러운 이동에는 이를 조절하고 준비시켜줄 공간적·시간적 영역이 필요하게 된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요소로서 과정적 공간이 도입되었다.

마치 사찰의 대웅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주문(一柱門)을 지나고 금강문 다음 사천왕문(四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을 지난다.

일상에서 그 공간으로의 진입할 때 생뚱맞은 곳, 정서적으로 충격, 낯섦을 느끼게 하며 일상의 시선을 차단하고, 차양이 전혀 없는 광장 바닥을 걸어 지나며 햇볕과 바람을 느끼며 회랑 좌우 기둥 사이를 걸으며 빛과 그림자를 느끼시라. 과거에 이르는 길은 쉬는 곳이 아니라 경유하는 곳이다.

전쟁기념관은 '군사박물관+기념관'의 복합적 성격을 가진 문화시설이기에 관람객은 약간의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기념관 외부에서는 신체적 움직임에 따른 감성이 중요하고, 각 전시 공간은 생경한 전쟁 무기와 같은 콘텐츠로 채워지기에 이성이 작동한다. 전체적으로는 걷고 보며 들으며 빛과 어둠을 느끼는 즐거움이 중요하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공간에서 직접적인 유기적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같이한다. 산 자도 휴식해야 할 때가 있다. 이날 국립현충원은 코로나를 이유로 패쇄되어 유족들이 고인을 추모할 권리가 박탈되었으나 전쟁기념관만은 제한적이나마 열려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곳은 현관 캐노피(canopy)였다. 광장과 건물, 주변의 도로와 외부 공간을 연계하는 캐노피는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형상화했다.

건축은 영화 제작 과정과 비슷하다. 전체 사나리오가 중요하고 순간순간의 장면도 중요하다. 전체와 디테일을 같이 보아야 한다.

이성관은 건물이 지어진 이후의 상황을 투시도를 통해 극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줄눈, 색연필 등으로 표현한다. 빛이 창 내부에 들어왔을 때의 시간대별 변화를 담아내는 웨더링(weathering) 작업은 필수이다. 평소 공간 내외의 사람들 행태와 사물을 관찰하는 습관이 설계의 바탕이 된다.

[프리랜서 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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