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직장인 레시피] 1등을 질투하지 말고, 장점을 따라 하라

입력 2021/09/30 15:00
직장 생활에 ‘야심’이 있다면 1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의 근무 태도와 일에 임하는 자세, 대인 관계 등을 관찰하고 ‘나와 다름’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연예인의 춤과 노래를 커버하듯 받아들이고, 안 되면 따라 하기라도 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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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에게는 분명 남다른 것이 있다

얼마 전 도쿄올림픽이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도쿄올림픽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또한 이전의 올림픽과 많이 달라졌다. 오직 금메달을 따기 위해 대회에 참가하고, 은메달을 따도 흡사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선수들은 연마해 온 기량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선수도 국민도 모두 그 과정을 즐기는 올림픽이 되었다. 바람직한 모습이다.


안산, 김제덕, 신유빈, 황선우 같은 MZ세대의 밝고 당당한 모습도 있었고, 김연경, 김정한 등 노련한 고참 선수들의 활약도 올림픽이 단순히 순위 경쟁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 본연의 가치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금메달의 가치가 예전만 못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선수의 4년간의 피나는 노력과 연습의 결실로서 금메달은 여전히 금빛이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MZ세대가 주류로 편성되는 지금의 직장 문화에서 개인, 가족보다 회사와 일을 1순위에 올리고 매진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일을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 일종의 균형감이랄까. 공적인 회사 업무와 사생활의 병립이 이루어지고 이를 다루는 솜씨 또한 젊은 세대가 어쩌면 더 익숙하다. 그럼에도 어떤 조직이든 1위는 존재한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노력과 열정을 투입하지만 각자의 결과물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학창 시절, 간밤에 텔레비전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 누가 출연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좔좔 늘어놓는데도 시험에서 꼭 1등을 하는 ‘녀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혹은 놓치고 지나치는 특별함이 있는 것일까. ‘분명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그의 성적, 성과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타고난 유전자로 인해 집중력과 암기력이 뛰어날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게 족집게 고액 과외 선생에게 특별 수업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시험을 치고 업무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바로 ‘그 녀석’ 본인이다. 시험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다.

링 위에 오르기 전 트레이너와 코치들이 다닥다닥 붙어 열심히 조언해 주지만 결국 사각 링에 올라 주먹을 내는 것은 권투선수의 몫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직장생활에서 야심이, 혹은 목표가 있는 직장인이라면 1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의 근무 태도, 업무에 임하는 자세, 대인 관계 등을 관찰하고 ‘나와 다름’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연예인의 춤과 노래를 커버하듯 받아들이고, 안 되면 따라 하기라도 하는 것이 필요하다.

1위는 다르다. 어떤 조직에서든 선두를 달리는 이들을 보면 뭔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능력일 수도 있고, 친화력일 수도 있고, 리더십 혹은 남다른 처세일 수도 있다. 하지만 1위에게는 남들이 캐치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무엇’이 있다.

그것을 배워야 한다. 1위가 밤늦게까지 MBA를 준비하고, 중국어 학원을 다니고, 미리 골프 연습하는 것을 알아내기는 쉽다. 하지만 정작 1위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그것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고 어떤 경우에 그 배움의 효과를 폭발시킬 수 있느냐’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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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을 견제할 때 나의 선택은?

재계 중견 그룹 A기업 박 전무가 있다. 그는 이사에서 상무보, 전무까지 초고속 승진한 직장인이다. 부장까지는 부침도 있고 고생도 했지만 이후는 탄탄대로였으며, 사장까지 당연히 승진할 것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에이스다. 박 전무는 공채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회사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입사했다. 수석 합격 직원답게 박 전무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업무 습득 능력도 동기들에 비해 빨랐다. 물론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그의 행동과 말을 돋보이게 하는 후광 효과로 작용하기도 했다.

박 전무는 상사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일 잘하고, 알아서 척척 일을 찾아서 해내는 그를 좋아하지 않을 선배는 없을 터. 박 전무는 회사 핵심 부서에 배치되어 일을 배웠고 이로 인해 동기나 선배들로부터 “그 기수에서는 박이 최고야. 제일 먼저 대리 달고 승진할 거야”라는 소리를 들었다. 박 전무는 겸손하게 행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당연히 내가 최고지’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만만치 않은 것. 박 전무가 입사할 무렵 회사는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경기가 살아나 4년 연속 원래보다 더 많은 신입을 뽑았다. 매년 대략 50~60명 안팎으로 신입을 선발했는데 4년 동안은 그 인원이 배로 늘어 매년 100명 정도를 채용한 것이다. 그러자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리와 부서는 한정적인데 후보자는 늘어난 것. 일테면 핵심 부서 기획조정실만 해도 신입의 부서 배치를 증원했지만 신입끼리의 경쟁은 배로 늘었다. 원래 2명을 배치해 예년 같으면 20 대 1의 경쟁이었지만 이제는 50 대 1의 경쟁이 되었다. 또한 부서원 구성도 부장, 차장, 과장 아래 한 기수 차이로 부서원들이 5~7명씩 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회사는 부서를 신설하고 새로운 사업 부서를 확충했지만 단기간에 이를 해소하지 못했다. 또한 4년 동안 400여 명의 신입 사원이 들어오면서 기수 차이는 있지만 실질 나이는 선배와 동갑이거나 혹은 선배보다 나이가 많은 후배들도 많아진 상황이었다.

박 전무는 들어올 때부터 주목을 받았기에 리더들에게서는 총애를, 4년 차까지의 직속 선배들에게는 시기를 동시에 받았다. 그때 박 전무에게 ‘천적’이 생겼다. 바로 3년 위 김 선배였다. 그 역시 기수에서 수석으로 들어온 엘리트. 김 선배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일 처리로 바로 위 선배는 물론 후배들에게도 직장인의 표본으로 꼽혔다. 그런데 이 김 선배가 박 전무를 은근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김 선배로서는 바로 위 선배나 후배들 가운데 경쟁자가 없다고 판단했는데 박 전무가 자신의 경쟁자 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이때부터 박 전무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사사건건 박 전무의 아이디어, 기획, 일 처리에 개입하고, 참견하고, 지적했다. 물론 김 선배의 이 같은 행동이 생트집은 아니었다. 연차 낮은 직원들이 간과할 수 있는 디테일한 문제로, 이는 시간이 가고 경력이 쌓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김 선배는 혹독할 정도로 박 전무의 미숙한 일 처리와 디테일 부족을 지적했다.

박 전무가 조금은 튀는 스타일이긴 했다. 부장 주재 회의에서도 선배들의 기획안을 지적하고, 다른 직원들의 업무에 관여하기도 했다. 물론 그 결과는 긍정적이고 부서의 이익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박 전무의 이런 ‘오버 행동’은 선배나 대리, 과장급에게는 조금 불편한 부분이었다. 부장과 차장은 칭찬했지만 나머지 부서원들은 불만과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박 전무 앞에 호랑이와 여우를 합쳐 놓은 김 선배가 등장한 것이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박 전무는 공식 회의에서 김 선배의 지적에 ‘깨지기’ 일쑤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박 전무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 네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자. 내가 기어코 네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각오로 일에 몰두했지만, 결과는 김 선배의 능력과 경험에 늘 반걸음 모자랐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객관적인 위치에서 박 전무를 바라보던 부장이나 차장도 박 전무의 일을 다시 체크하는 일이 발생했다. 신뢰를 조금씩 상실한 것이다. 1년이 지났다. 부서에서 박 전무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자신의 반짝이는 아이디어, 기획력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설사 흥미와 관심이 생겨도 김 선배에게 이를 크로스 체크하거나 점검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와 함께 김 선배는 회사에서 여전히 ‘부동의 에이스’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했다.

충격을 받은 박 전무는 냉정하게 자신의 현재를 점검했다. 그는 김 선배가 자신을 경쟁 상대로 여기고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김 선배의 바로 위, 바로 아래 기수 중에서도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된 사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한 마음도 들었지만 박 전무는 지금의 위치와 업무 능력에서 김 선배를 당해 낼 재간이 없음을 알았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이었다. 해서 박 전무는 향후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리했다. 우선 나서지 않고 조용히 주어진 일에 몰두하며 미래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동안 다른 직원의 업무에 나섰던 것 역시 ‘나는 이만큼 잘났다’라는 공명심에서 나은 것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실력을 쌓기로 했다. 모자라는 부분은 자격증을 따고, 외국어 공부에 더 매진하고, 아무도 모르게 MBA도 준비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김 선배를 파악하는 일. 그는 입사 때도 지금도 여전히 1등이다. 그렇다면 그가 1등을 유지하는 전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김 선배의 장점을 벤치마킹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박 전무는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1년여가 지나자 김 선배의 박 전무에 대한 견제는 사라졌다. 물론 몇 번의 시험이 있었지만 박 전무는 잘 통과했다. 그리고 김 선배, 즉 ‘1등 따라 하기’에 충실했다. 박 전무는 서서히 실력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김 선배에게 지적당했던 부분을 보완하면서 자신만의 장점을 빛내기 시작했다.


몇 년 후 박 전무는 대리가 되었다. 그동안 후배 기수 중에서 자신처럼 튀는 몇 명이 과장이 된 김 선배의 표적이 되어 나가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박 대리는 아직은 시간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더 고개를 숙였다. 이후 박 대리는 과장이 되고 김 과장은 초고속 승진해 부장 대우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동기보다 빠른 승진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사장이 관심을 갖는 신사업 부분 TFT가 만들어졌다. 이 부서에 배치된 박 과장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실력을 발휘해 사장의 눈에 들었다. 이후 박 과장은 사장실로 배치되어 사장의 측근이 되었다. 김 부장의 눈에서 벗어나자 그때부터 박 과장의 실력은 일취월장해졌다. 그는 사장으로부터 “이런 인재가 왜 아직까지 중용되지 않았나?”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후 박 과장은 차장, 부장으로 승진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괴로웠지. 그런데 생각하기 나름이야. 김 선배는 어쩌면 나에게 훌륭한 선생님인 셈이지. 그때 내가 김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면 건방지고 나대는 직원 정도에 그쳤을 거야. 나는 김 선배에게서 1등이 가져야 하는 기본 자세, 실력, 리더십 모두를 배웠어. 그것은 한마디로 ‘겸손함이 수반된 유능함’이었지. 그 겸손에는 팀에 대한 화합, 선배와 동료에 대한 배려, 그러면서도 일을 해결해 내는 실력이 있었어. 내가 이사가 되고 지금의 위치에 오른 데에는 큰 후원자가 있어. 물론 나를 발탁하고 중용하신 그때의 사장님인 회장님이 제일이지만, 또 한 사람이 있지. 바로 지금의 사장님이야. 김 선배가 바로 사장님이야.”

직장인이라면 설익은 야심을 드러내거나 역전의 기회를 엿보는 자세가 상사의 경계와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또한 그 시작점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시작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 걸음 뒤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고 싶은 본능은 자신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흐트러뜨린다. “내가 왜 이 정도 대접밖에 받지 못하나”, “저 무능력한 김 과장보다 내가 승진에서 뒤처지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등등 대개의 직장인은 연봉과 지위 등 현재의 나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사나 회사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그 자리, 그 연봉도 네 능력에 비하면 과분한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간극에 직장인은 좌절하고 때로는 오버하는 것이다. 수없이 강조하지만 상사는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부하 직원을 인정도 용서도 하지 않는다. 능력, 업무 성과, 리더십과 인품 등은 물론이고 아주 사소한 것에서조차 우월하거나 뛰어나도 상사는 절대 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여라. 그리고 때를 기다려라. 물론 오감은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왜? 기회가 오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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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1등을 벤치마킹한 창업자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 청나라가 주목 받는 것은 한족이 아닌 왕조라는 점이다. 만주족 출신의 청나라는 명나라는 물론 조선도 상대하지 못할 존재였다. 몇십 명씩 몰려다니는 유랑족이었고, 한자도 모르는 무식한 거지떼 정도였다. 이 사분오열된 만주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이가 누르하치다. 그는 청나라 건국 후 태조로 추증된 만주족 영웅이다. 누르하치의 창업은 그가 25세 때 불과 수십 명의 병력으로 시작했다. 3년 만에 부족을 통일하고 10년 만에 만주족을 하나로 모았다. 군사를 일으킨 지 22년 만에 왕으로 등극했고, 1619년 싸얼후산 싸움에서 명나라조선여진 연합군을 물리쳤고 그의 아들 청 태종이 북경에 입성해 청나라를 세웠다. 물론 누르하치는 병자호란을 겪은 우리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지만 그에게도 배울 것은 있다. 무에서 유를 이룩한 창조성과 통일 리더십 그리고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끈기로 승리를 쟁취한 유연함이다.

누르하치는 1559년 태어났다. 누르하치란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 주었다. 누르하치는 여진어로 ‘멧돼지 가죽’이란 뜻. 누르하치는 영리했고 10세 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등 무술에도 재주를 보였다. 당시 부족은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 장백여진 등으로 분열되었고, 다시 건주여진은 5부족, 해서여진은 4부족, 야인여진은 4부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누르하치는 10세 때 어머니가 죽자 명나라 요동총병 이성량의 노비가 되었다. 타고난 영리함으로 이성량의 주목을 받았고 그는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1583년, 할아버지, 아버지는 명나라의 전투에서 모두 죽었다. 이성량은 건주여진의 부족장으로 누르하치를 지목해 누르하치는 독립할 수 있었다. 당시 병력은 아버지의 부하 수십 명과 갑옷 13벌뿐이었다.

점점 세를 잃어 가던 명나라는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어 그 세력으로 여진 전체를 다스리는 대리 통치로 정책을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이를 파악하고 충성을 다짐하고 야심이 없음을 항상 표현했다. 이성량은 여진족 중에서 누르하치를 선택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후원과 쌓아온 경제력을 바탕으로 1589년 건주여진 5부족을 통합했다.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성장세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에게 뇌물을, 명나라 조정에는 조공을 바치면서 감시와 의심을 푸는 데 성공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며 급부상하자 해서여진과 그 밖의 여진족도 힘을 합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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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에게 배우되 나의 장점을 지켜라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제안했다.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겠다고. 명나라는 물론이고 조선 사대부들은 ‘오랑캐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누르하치는 예상했다. 그는 참전 제안을 통해 명나라에게 임진왜란 동안 군사 도발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조선 파병군 사령관은 이여송. 그는 이성량의 아들이었다. 즉, 이성량 부자가 당시 명나라 주력군을 이끌고 요동에 주둔했다. 명나라의 관심이 임진왜란에 쏠려 있는 동안 누르하치는 통일 전쟁에 집중했다. 1593년,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제 모든 만주족이 누르하치를 수장으로 인정했다.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관직을 하사했다. 누르하치는 조공을 바치며 충성심을 표현했다.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너무 커졌다고 생각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명나라는 대안이 없었다. 몽골을 비롯해 북방 이민족의 세력화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은 오직 누르하치뿐이었다. 누르하치는 치밀했다. 그는 명나라는 물론 조선 사신에게도 공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1599년 명나라는 예허여진을 누르하치의 대항마로 선택했다.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아홉 부족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 했고,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관직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명나라에 복종했다. 진짜 복수를 위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만용으로 명나라에 복수심을 드러낼 수도 있었지만 누르하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이성량의 노비 신세가 되어서도 그의 신임을 받을 정도로 속마음을 철저히 숨겼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기운이 쇠하기 시작하는 1609년까지 매년 조공을 보냈다. 그러면서 조공단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만리장성과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마을, 양식 창고, 도로, 성곽, 군 주둔지를 정탐하라는 것.

누르하치는 국가 시스템 ‘팔기八旗’를 구성했다. 팔기군은 평상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말을 타고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는 기동력이 우수한 군대였다. 팔기군은 청나라 최고 정예 부대였다. 각 군 사령 8명이 모여 최고 지휘관을 선출하는데, 이가 바로 만주족 수장이다. 이들은 향후 청나라가 중국을 다스리는 핵심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이제 명나라와의 정면 대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누르하치는 자신을 ‘한汗’으로 부르게 하고, 국호는 ‘후금後金’으로 정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마침내 명나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명나라는 50만 명의 만주 토벌군을 출정시켰다. 병부시랑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4개 부대와 조선에서 파견된 강홍립의 1만 명, 누르하치에 반기를 든 여진족 등이다.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이끌었다. 명나라는 연합군과 합동 작전을 펼치기로 했지만 총병 두송이 치고 나갔다. 그는 싸얼후 도강 작전을 진행했지만 명나라 군은 급류에 휩쓸려 많은 수가 죽었다. 두송은 계번성에서 호위무사 400명과 있는 누르하치를 노렸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작전을 알고 있었다. 그는 5만 명의 팔기군으로 명나라 본진을 공격했다. 명나라 군은 몰살당했다. 두송 역시 전사했다. 명나라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누르하치는 만리장성을 넘어 심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북경 근처 영원성에 당도했다. 영원성 성주 원승환은 화포로 맞섰다. 누르하치는 전투를 지휘하다 파편에 맞아 부상당했다. 그 부상은 치명상이 되었다.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누르하치는 원정 중 사망하고, 그 뒤를 청 태종이 되는 아들 홍타이지가 이었다. 1628년 누르하치의 나이 67세 때다.

누르하치는 1등 명나라를 벤치마킹하는 학습력을 통해 창업에 성공했다. 부를 축적하고, 관료 제도 및 군대를 정비하고, 문자를 만들어 소통 수단을 마련하고, 문화의 중요성 등 모든 것을 배운 것이다. 또한 누르하치는 이 학습의 결과를 만주족의 실정과 현실에 맞춰 적용했다. 명나라에게서 1위의 장점을 차용했지만 만주족의 본래의 장점인 인내와 끈기, 검소를 결코 잊지 않은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인용 및 참조 『글로벌 CEO 누르하치』(전경일 지음/삼성경제연구소 펴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98호 (21.10.0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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