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줄리안 오피가 만든 원색의 가상 도시…팬데믹에 이국의 도시를 걷는 방법

박찬은 기자
입력 2021/11/25 11:51
수정 2021/11/25 14:59
걷는 사람, 원색의 픽토그램. 그의 작업은 한눈에 들어온다. 누가 봐도 ‘줄리안 오피’란 얘기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실제 전시하는 지역과 장소를 반영하는 그의 작업방식마저 바꿔놨다. 여행 대신 런던 작업실에서 3D 지도로 건물을 들여다 보고, VR 고글을 쓴 채 한국의 전시장을 3차원 가상공간으로 만들어 보고 작품을 배치했다. 평면에서 조각으로 나온 ‘걷는 사람들’ 연작은 한층 톤 다운됐고, 고정 관념을 깬 건축물과 원색의 동물은 코로나 블루에 활기를 부여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인 줄리안 오피의 개인전이 7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개인전 가운데는 가장 규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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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과 윤곽선이 선사하는 리프레시

LED로 외벽을 수놓은 서울스퀘어 외벽의 미디어파사드 ‘걷고 있는 사람들(Walking People)’로도 유명한 줄리안 오피(Julian Opie). 그의 작품은 마치 분자요리 같다.


선은 최대한 단순화시켰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미니멀한 첫 번째 인상이 깨질 만큼 피사체의 디테일이 대단하다. 게다가 이 모두가 상상이 아닌 실제 모델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마저 알고 나면 놀라게 된다. 작품을 한참 보다 보면 레깅스를 입은 채 커피를 들고 걷는 여성과, 통화를 하며 서류 가방을 들고 바삐 걸어가는 남자가 보인다. 그 순간 얼굴과 이름이 없던 불특정 인물은 어딘가에서 실제 살고 있는 누군가로 변신한다.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11월28일까지 열리는 ‘Julian Opie’전은 사람, 동물, 건물, 풍경과 같은 현대적이고 일상적 주제를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는 줄리안 오피가 7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방한은 하지 못한 채 영국 자신의 작업실에 앉아 3D로 만든 국제갤러리 가상공간을 걸어 다니며 동선을 짠 그는 갤러리 2개(K2, K3)와 정원을 사람과 동물, 도시와 건축물로 이뤄진 축약된 가상 도시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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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 오피(b.1958) ‘야간 3.(Nighttime 3.)’ 2021 Continuous computer animation on LED screen 175 x 20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많은 이들이 코로나 블루를 겪고 있는 와중에 작품속 사람들은 몸을 감싼 외투 속에서 톤 다운된 색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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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 오피(b.1958) ‘수탉 3.(Rooster 3.)’ 2021 Aluminium, nylon and lights 68 x 64 x 9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인공적인 원색을 덧입힌 동물은 기존의 관념을 깨고 공간에 활기를 부여한다.

K2의 1층에는 그의 연작 시리즈인 ‘걷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2009년부터 꾸준히 걸어온 그들은 이제 선이 좀 더 간결해지고, 색은 다운됐다. 어느 날 런던 동쪽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에 앉아 있던 줄리안 오피는 바깥 풍경을 보다 겨울 옷으로 무장한 채 길을 헤쳐나가는 이들을 목격한다. 그간 작업해온 원색이 아닌, 톤 다운된 차분한 색감이 눈에 띈다. 실제 사람들의 옷이나 소품, 머리색, 피부 톤에서 대표 색을 따온 덕분이다.


라이팅 박스 ‘Nighttime 3.’ 속에서도 사람들은 걷고 있다. 행인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검은 배경에서 빛이 투과하면서, 각 선은 더욱 입체적으로 보인다. 횡단보도 위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이들 사이에 각각의 크고 작은 특징이 작품 속에 캡쳐된 채 명멸한다. 바삐 움직이는 몸짓 그대로를 역동적으로 담은 LED 영상과 함께 평면 회화에서 빠져 나와 알루미늄 조각 작품으로 입체화된 사람들. ‘걷는다’는 평범한 행위가 예술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2층으로 올라가 보자. 주황과 하늘색 배경에 노란색 몸으로 빛나고 있는 소와 녹색의 라이팅 박스에서 푸른색 선으로 빛나는 사슴이 눈에 들어온다. 홍학과 소, 당나귀, 수탉, 강아지 등의 동물이 단순화된 상징 부호처럼 전시돼 있다. 동물은 줄리안 오피 작가가 오랜 시간 지속해온 주요 작업군 중 하나다. 좌대 위에 놓인 알루미늄 재질의 강아지 평면 조각은 실제와는 다르게,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져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새겨진 ‘동물’ 개념을 벗어난다. 자연과는 다른 인공적인 원색을 입고 전시장 벽의 밝은 라이트 박스에 새겨진 토끼 회화는 마치 브랜드 로고 또는 광고, 표지판처럼 느껴진다. 팬데믹의 회색 시대에 활기를 선사하는 상징 부호 같달까.

▶3D 갤러리를 만들어 동선을 기획하다

장기간 지속되는 코로나19 상황은 작가의 작업 방식마저 바꿔놨다. 인사동과 신사동, 사당역 등을 둘러보고 2014년 ‘Walking in Sadang-dong in the rain.’(2014)을 선보였던 것처럼, 줄리안 오피는 자신의 전시가 열리는 해당 도시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꾸준히 작품에 활용해 왔다.


도시를 관찰하고 그 장소의 특징과 트렌드, 계절감까지 작품에 담아낸 것. 작가는 팬데믹으로 하늘길이 막히자, 물리적인 여행 대신 가상의 3D 구글 지도를 통해 빽빽하게 들어선 인천의 오피스텔 건물을 발견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2관 야외 정원에 설치된 알루미늄 스틸 소재의 조각 작품 ‘인천, 타워 2208. (Incheon, Tower 2208.)’이다. 똑같이 생긴 수십, 수백 개의 건물이 도열해 있는 것을 인상적으로 여긴 작가는 이를 수백 개의 창문, 특유의 직선적이며 기하학적 선을 지닌 하얀 색 건물로 재탄생 시켰다. ‘인천, 타워 2208.’은 그 앞을 걸어가는 사람 조각과 함께 이색적인 여행 풍경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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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선을 통해 평면에서 입체로 나온 동물들. 국제갤러리 2관(K2) 줄리안 오피 개인전 《Julian Opie》 설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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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 오피(b.1958) ‘도시 1.(City 1.)’ 2021 Powder coated aluminium 428 x 163 x 178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국제갤러리 3관(K3) 줄리안 오피 개인전 《Julian Opie》 설치 전경

야외에 설치된 현대적인 이 마천루와 대비를 이루는 것이 바로 실내에 조성된 앤티크한 느낌의 검은색 첨탑 ‘City 1.’이다. 종과 첨탑이 많은 런던 옥스포드 중앙부 구시가지의 건물들로 형성된 2점의 4m짜리 설치물은 코로나로 인해 그 어느 시기보다 런던에 지긋이 머물게 된 작가가 포착해낸 풍경이다. 자신이 오래 살아온 도시의 역사적이고도 현대적인 건물들을 입체적인 금속 조각으로 재해석한 것. 코로나로 이동이 어려워진 와중에, 벨기에 해변 도시 ‘크노케(Knokke)’를 방문한 줄리안 오피는 그곳에서 마주한 도시 행인들을 이 런던 구시가지 건축물 사이에 놓아 두었다. 평면 회화 속에 있던 사람들이 조각으로 현실 세계에 나온 것. 덕분에 크노케 사람들이 옥스포드 거리를 걷는 장면이 비대면으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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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정원 줄리안 오피 개인전 《Julian Opie》 설치 전경. 작가가 3D 구글어스로 발견한 인천의 한 건물에서 모티브를 얻은 ‘인천, 타워 2208.(Incheon, Tower 2208.)’이 걷는 사람 조각 뒤에 서 있다.

건축물의 골격만 잡아낸 ‘도시1.(City 1.)’ 같은 대규모 설치작부터 ‘수탉3.(Rooster3.)’ 같은 작은 크기의 평면 작품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이번 전시는 익숙했던 일상 풍경이 줄리안 오피만의 미니멀리즘 필터를 거쳐 어떻게 변화되는지 볼 수 있는 기회다. 작가 본인이 3D 가상공간에 작품을 배치하고 VR 고글을 낀 채 가상의 전시장을 직접 둘러보며 동선을 구성한 덕분에 관객들은 저마다의 선과 색, 규모와 운동성, 그리고 대상과 재료 간 역동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작가가 직조한 새로운 세상은 팬데믹 시대 ‘나만의 방’을 여행하며 많은 이들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했던 일상이 낯설어지고, 이국의 도시를 눈앞에서 만나는 것 말이다. 늘 보던 풍경이 새로워졌다면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게 아닐까.

줄리안 오피 개인전 ‘Julian O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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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 직접 내한하지 못한 줄리안 오피 작가는 런던의 작업실에서 3D로 국제갤러리 가상공간을 만들어 동선을 짰다. 줄리안 오피 작가 프로필 이미지(이미지 제공: 국제 갤러리)

-전시 기간 ~2021년 11월28일(일)

-전시 장소 국제갤러리 K2, K3

줄리안 오피 195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982년 골드스미스 대학 졸업 후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작가의 작품은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국립 초상화 미술관을 비롯, 뉴욕 현대미술관(MoMA), 도쿄 국립현대미술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등 세계 주요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대 초상화, 이집트의 상형문자, 일본의 목판화뿐 아니라 공공 및 교통 표지판, 각종 안내판, 공항 LED 전광판 등에서도 두루 영감을 받는 작가는 수원시립미술관(2017), F1963(2018)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서울, 부산, 대구, 전남, 김포에서 영구 설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한국에서도 꾸준히 작업을 선보여 왔다.

[글 박찬은 기자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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