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국내 1호 디지털 장의사…"당신 옭아맨 동영상 사진 악플 지워드려요"

입력 2021/12/07 17:07
수정 2021/12/08 08:26
국내 1호 디지털 장의사 김호진 산타크루즈 대표

온라인 세계의 악성댓글
성폭력 게시물 삭제하는
디지털 장의사로 14년째

청소년 의뢰인은 무료
가해학생은 '반성문 3장'
잊힐 권리 법제화 절실
기억은 축복이지만 때로 저주다. 누구나 잊고 싶은, 또 잊히고 싶은 기억이 있다.

김호진 산타크루즈컴퍼니 대표는 온라인 세계를 떠도는 괴물 같은 기억을 삭제하는 일을 하는 '디지털 장의사'다. 홧김에 올렸다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게시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촬영된 성폭력성 사진 등을 지워준다. 신간 '디지털 장의사, 잊(히)고 싶은 기억을 지웁니다'를 출간한 그를 최근 충무로 매경 본사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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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디지털 장의사` 김호진 산타크루즈컴퍼니 대표가 `잊힐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 한주형 기자]

"처절한 고통 앞에서 비명 지르는 피해자를 보면 참 마음이 아파요."

때는 2008년, 악성댓글 소동이 그의 행로를 뒤바꿨다.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모델 캐스팅 디렉터로 일하던 그는, 유명 식품회사 모델로 한 꼬마를 섭외했다. 광고가 나간 뒤 반응은 뜻밖이었다. 모델 여아의 '안티 카페'가 만들어지더니 악성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에게 일상을 돌려줘야 했어요. 그때만 해도 '디지털 장의사'란 개념이 없어서 직접 지우기 시작했죠."

디지털 장의사란 당초 망자의 온라인 기록을 삭제하는 일을 뜻하는 신조어였다. 주로 유족이 돌아가신 분의 기록을 지워달라고 요청했다. 지금은 피해자의 기록을 삭제하는 업무 전반을 '디지털 장의'로 통칭한다. 마치 망자의 장례를 치르듯 온라인에서 모든 흔적을 말끔하게 지우기 때문이다. 회사를 창업하고 입소문이 나자 갖가지 아픈 사연이 그를 찾았다.

"막 취업한 여성 의뢰인의 사연이 특히 기억나요. 회사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 키워드로 '○○○ 동영상'이 뜨는 거예요. 모함이었는데 결국 지워서 회사를 무사히 다니게 됐죠. 결혼을 앞두고 게시글이 올라와서 협박당한 사례, 청소년 의뢰인도 너무 많아요."

청소년 의뢰인의 게시글 삭제는 무료다. 대신 '반성문 3장'을 받는다. 첫째, 게시글을 올릴 때의 마음. 둘째, 게시물을 내리려는 이유. 셋째, 앞으로 온라인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김 대표가 개인정보를 가리고 보여준 반성문엔 가해 학생의 참회록이 빼곡했다.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이유에서 굳이 '반성문'을 받고 있어요. 징벌보다는 고백에 가까워요. 반성 후 의뢰하기도 하지만 은폐하려는 경우도 있죠. 가해자 부모가 나서는 일도 많고요. 일단 올리지 않는 윤리의식이 절실해요."

'피해자일수록 숨어선 안 된다'고 그는 조언한다. 즉시 대응하지 않으면 또 다른 허구가 자신을 공격한다는 이유에서다. "책을 쓰면서 안타까운 분들의 기억이 많이 났어요. 댓글을 읽다가 자신이 처량해지고 그래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숨지 말고 적극 대응하셔야 합니다."

디지털 세계에서의 윤리를 위해선 무엇보다 '상대방을 비방하지 말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상대를 공격하면 자신도 공격당해요. 그리고 안 좋은 얘기는 메시지보다는 전화로 이야기하세요. 무엇보다 '잊힐 권리'를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해요.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잊힐 권리를 충분히 보장할 법이 만들어져야 해요."

누군가에겐 새 삶을 허락해 주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일이 숭고하다는 평가에는 손사래를 친다. 그럼에도 14년째 디지털 장의사란 직함을 지켜온 그는 "이 일은 내 운명"이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큰 의미를 뒀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마음고생하는 분들을 돕고 인터넷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운명은 우연을 가장해 찾아온다고 하잖아요. 당시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돌아보면 그저 처음부터 내 길을 밟아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일을 천직이라 여기려 해요."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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