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형체 허물고 존재 본질 담은 거장들

입력 2022/01/20 17:26
수정 2022/01/20 18:16
학고재 '에이도스를 찾아서'

서정적 추상화가 류경채
일필휘지로 봄 그린 이상욱
초현실주의 접목한 천병근
자연의 정감 녹인 강용운 등
한국 추상화가 7인전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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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채 1985년작 `날 85-6`. [사진 제공 = 학고재]

차가운 추상마저 온기가 돈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주목받았던 류경채(1920~1995)의 작품 '향교마을 75-5'와 '날 85-6'은 40년 전 작업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수작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류경채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거머쥘 정도로 뛰어난 구상화가였지만, 계절이나 날씨 등의 정감을 표현한 서정적 추상으로 나아가 한국 추상회화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의 작품은 서구에서 건너온 기하학적 초상과 닮아 보이지만 붓질이나 나이프 자국 등으로 화면에 개성 있는 운율을 새겨 넣어 차별화했다. 한국 추상화로 세계적 브랜드가 된 단색화에 대한 힌트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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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욱 1984년작 `봄-B` .

함경남도 함흥 출신 이상욱(1923~1988)의 1984년 작품 '봄-B'는 물감을 묽게 희석한 후 일필휘지로 붓을 휘갈겨서 서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서구의 추상표현주의를 우리 식으로 내재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추상회화 역사를 되짚어보는 대형 기획전 '에이도스(eidos)를 찾아서:한국 추상화가 7인'전이 학고재 전관에서 펼쳐졌다. 김복기 경기대 교수(아트인컬처 대표)가 총괄 기획한 이번 전시는 잊힌 작가들의 미술사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의 첫발을 뗀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이다.

전시 제목의 '에이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존재 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상(事象)의 본질을 좇는 추상회화의 속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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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두 1988년작 `생의 원(源)`.

한국적 추상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남관(1911~1990)을 제외하고 이들 뒤를 이어 추상회화 족적을 남긴 1920~1930년대생 작가들 위주다.


류경채와 이상욱을 비롯해 서울 출신 이봉상(1916~1970)과 전라남도 화순 출신 강용운(1921~2006), 경상북도 군위 출신 천병근(1927~1987), 경상남도 창녕 출신 하인두(1930~1989), 대전 출신 이남규(1931~1993) 등 7인의 작품 총 57점을 모았다. 별관 전시장 한편에 작가들 교류 기록을 모은 아카이브 섹션도 선보였다. 이들 대부분이 후학을 양성하고 훈장도 받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음에도 작고 후 상당 기간 전시가 없었던 역사는 반성할 만하다.

김복기 교수는 "한국 추상회화는 서구 미술의 추상 계보로 온전히 설명이 안 된다"면서 "현대미술의 큰 흐름인 추상회화라는 보편적 형식에 한국 정신을 담아 주체적으로 자기화하려는 과정이야말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예술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박미란 학고재 디렉터는 "단색화로 촉발된 한국 미술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단색화 전후좌우로 미술사 연구를 펼쳐서 더욱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기획했다"고 밝혔다.


이봉상은 홍익대 교수를 그만두고 쉰이 넘어 뒤늦게 추상을 본격화한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난 아쉬운 인물이다. 1968년작 '미분화시대 이후2'는 식물 열매 단면이나 세포를 연상시킨다.

천병근은 일본에서 배운 초현실주의를 추상에 접목했다. 국내 화가들의 첫 해외 전시였던 1958년 '한국현대회화전(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 이중섭 등과 함께 발탁돼 참여했다. 그는 후반기 구상화로 회귀하며 잊혔다.

강용운은 광주에 남아 호남 추상미술을 개척한 존재다. 전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1943년작 '눈이 있는 정물'을 선보였다. 1960년대에는 장판지에 물감을 흘리거나, 불을 지피는 등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면 1970년대에는 전통 수묵화처럼 묽은 물감으로 담백하게 자연의 정감을 녹였다. 이 밖에 오방색을 활용해 불교적 세계관을 구현한 하인두와 가톨릭 신자로서 생명의 빛을 표현한 이남규도 인상 깊다.

잊힌 작가들의 DNA가 후대로 이어진 것도 흥미롭다. 하인두는 부인이자 동양화가인 류민자와 사이에서 요즘 인기 절정인 '컬러 밴드' 작가 하태임과 '화이트(White)' 연작으로 유명한 하태범 작가를 낳았다. 류경채는 조각가 류인과 류훈의 부친이다. 강용운의 아들 강일진은 부친 뒤를 이어 호남 서양 화단을 이끌고 있다. 한진수와 부부 화가였던 천병근의 딸이 화가 천동옥이다. 전시는 오는 2월 6일까지이고 전시 관련 학술 세미나도 22일 오후 1시 학고재에서 열린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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