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라일락의 계절, 산과 들의 반가운 친구

입력 2022/05/06 09:52
꽃은 약속이다. 어여쁘게 피었다 어느 날 사라져도 서운할 게 없는 이유는 내년이면 어김없이 다시 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꽃이 져도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기까지 푸른 잎을 선사한다. 그래서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올해는 유난히 라일락이 많이 보인다. 그 향기 또한 가실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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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은 들이나 산보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더 자주 보게 되는 꽃이다. 연보랏빛의 라일락은 생긴 것도 예쁘지만 그 오묘한 향기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라일락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군락을 이루도록 가꾸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지금쯤 청주국립박물관 뜨락에 가면 라일락 향기가 공기 입자 하나하나에 달라붙어있는 듯 솔솔 부는 봄바람을 타고 특유의 향기를 뿌리고 있어 방문객들을 황홀하게 만든다.


라일락은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등이 있는 발칸반도가 고향이다. 라일락은 아라비아어로 푸르스름을 뜻하는 의태어 ‘라일락(ليلك)’을 영어로 번역한 형태인데, 페르시아어 ‘닐락(نیلک)’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릴라’로 부르기도 한다. 눈치채셨겠지만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라일락은 바로 그곳, 발칸반도에서 유입되어 원예종으로 전국에 퍼진 꽃나무들이다. 은은한 향기 외에도 꽃이 빼곡하게 피어난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라일락이 발칸반도 산은 아니다. 또한 외국에서 인기 있는 라일락 품종 가운데에는 한국 토종 라일락을 뿌리로 하는 수종도 있다. 우리나라 토종 라일락, 그러니까 한국산 ‘푸르스름한 꽃나무’ 즉, 꿀풀목 물푸레나무과의 낙엽 활엽 소교목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수꽃다리과로 북한에서 주로 많이 서식한다는 수수꽃다리, 남한의 대표적 라일락으로 털개회나무가 있다. 모두 라일락이다. 북한에서 주로 자연 서식하는 수수꽃다리가 그런 이름이 된 것은 꽃이 수수처럼 풍성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수수꽃다리는 북한에서 주로 자라지만 우리나라 중부지역에서도 많이 식재되고 있는데, 토종이 아닌 이식에 성공해 원예화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털개회나무는 수수꽃다리와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비교적 왜소한 편이고 잎이 뒤틀려 있다. 꽃의 뒷면에 부드러운 털이 밀집해 있다는 점도 특이한데, 그래서 이름도 털개회나무가 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식물이 그렇듯 털개회나무 역시 비슷한 아류들이 많이 서식하는데, 정향나무, 흰정향나무, 섬개회나무, 흰섬개회나무 등이 거기에 해당된다. 학술적으로는 모두 털개회나무로 통합되었지만 식물 애호가들은 분류해서 인식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라일락 이야기를 하면서 미스김라일락을 빼 놓을 수 없다.


1947년, 우리나라는 해방과 새출발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다도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미국의 식물 채집가 엘윈 M. 미더가 입국, 북한산 백운대에 서식하던 털개회나무 종자를 채취,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 과정을 거쳐 공식명 미스김라일락(Miss Kim Lilac, Syringa patula ‘Miss Kim’)이라는 신품종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가져가 미스김라일락으로 재탄생한 종자는 미국 소유가 되었다. 이름에 미스김이 붙은 것은 당시 엘윈 M. 미더의 업무를 돕던 한국인의 성씨가 김 씨였고, 그 성을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미스김라일락은 발칸발 라일락에 비해 향기가 두 배는 강하고, 꽃의 수명도 길어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점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스김라일락의 인기는 좋아서 1970년대부터 로열티를 지급하며 종자를 수입해 원예용으로 보급되고 있다. 우리나라 종자를 미국인이 채취해 가 주인을 바꿔버렸다는 점이 다소 분하긴 해도, 그 과정을 통해 미스김라일락을 마당이나 집 안에 모셔놓고 빛나는 봄을 만끽하게 되었으니 까탈스럽게만 볼 일은 아닌 듯하다. 예쁘고 향기로우면 된 것이고, 지금은 한국도 종자 관리를 잘 하고 있으니 편안하게 라일락 향기에 취해 보자.

[글과 사진 아트만]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28호 (22.05.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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