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화 ‘평평남녀’ 울퉁불퉁한 일상에 평화는 올까

입력 2022/05/12 16:45
영화 ‘평평남녀’는 능력은 있지만 승진 기회를 번번이 놓친 만년 대리 영진이 낙하산 상사를 만나, 일과 사랑이 더 제대로 꼬이는 이야기다. 영화 ‘죄 많은 소녀’의 히로인 이태경이 하루도 평평한 일상이 없는 주인공 영진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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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디자인 회사에 근무 중인 ‘영진’(이태경)은 모태 솔로로, 아이디어는 늘 윗선에서 잘리며 승진은 꿈도 못 꾸는 신세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 낙하산 ‘준설’(이한주)이 과장으로 왔다. 디자인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준설’을 팀원들은 무시한다. 왕따 당하는 준설에게 짠함을 느낀 영진은 그와 사내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쫄보로만 보였던 준설은 영진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큰 수주를 따내고, 영진은 다시 한번 승진 기회를 잃는다.


영화 ‘평평남녀’는 스릴러물 ‘파란 입이 달린 얼굴’로 한국 독립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 김수정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다. 회사 내 성공을 마땅치 않아 하는 동료 썸남에 대한 친구의 얘기를 듣고 감독이 기획한 작품으로, 영화 제목은 남녀 서로가 이기고 지고 하는 관계가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해 지었다. ‘평평남녀’는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다. 발랄한 로코나 ‘아멜리에’ 류의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밝은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언제까지 저렇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나’ 싶을 정도로 일과 사랑 모두에게 대차게 뒤통수 맞는 주인공을 계속 목도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어둡거나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 것은 바로 이태경 배우가 소화해낸 영진의 에너지와 함께, 그녀 주변 사람들의 연대감이 충전재처럼 따스하게 영진을 감싸 안기 때문이다. 영진은 일만큼 사랑에도 늘 치열하고 진심이다. 상대방에게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전사처럼 싸운다(심지어 물리적으로도). 무엇보다 관계 때문에 자신의 일이나 그 성과를 쉽게 포기하거나 내어주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며 스스로 성장해 간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무드가 힘을 잃지 않는다.


가끔은 독설을 뱉지만 가장 힘들 때 영진의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주는 룸메이트 언니 ‘하나’ 역은 ‘죄 많은 소녀’부터 드라마 ‘소년심판’까지 스크린과 TV를 종횡무진하는 배우 이솜이 맡았다. 지친 영진과 하나가 여행지에서 만난, 택시 기사 역을 맡은 배우 서갑숙의 모습도 반갑다. ‘디테일 연기의 신’으로 불리는 이태경은 이미 독립영화계에서 믿고 보는 배우로, 2018년 가장 강렬한 데뷔작 ‘죄 많은 소녀’에서 주연 ‘유리’ 역을 맡아 주목을 끌었다. 수많은 단편영화를 통해 짧지만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이한주가 소심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반전 캐릭터 ‘준설’ 역을 맡았다. 낙하산 상사에서 연인, 앙숙으로 ‘썸’과 ‘쌈’ 사이 다층적인 관계 변화를 일으키는 준설은 처음부터 자신이 낙하산임을 당당히 밝히는가 하면, 영진만큼 절박하게 그녀를 밟고 올라선다.

연애는 못하고, 능력은 있지만 화사일은 쉽지 않은 영진은 우리 주변에 평범하게 있을 법한 보통의 여성 캐릭터다. 회사 내 문제 해결사이지만 결코 뽐내지 않고, ‘미친X’로 인증될지언정, 남자 직원들의 성희롱을 절대 참아 내지 않으며, 자신의 것을 찾기 위해 악다구니를 쓴다. 몸 사리지 않고 생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과, 애정을 듬뿍 담아 어느 역할 하나도 허술하게 직조하지 않는 연출이 2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관계에 매몰돼 나 자신을 잃은 적은 없는지, 내 것을 찾기 위해 주인공처럼 맞서 싸울 수 있을지 가만가만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평평남녀’는 타인에 앞서 내 마음부터 돌보고, 가끔은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전사처럼 싸워야 평안하고 평평한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러닝타임 121분.

[글 최재민 사진 씨네소파]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29호 (22.05.1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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