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만지고, 낙서하고, 노래하고, 올라타고…"노는 게 예술이지"

입력 2022/07/01 17:07
수정 2022/07/01 21:09
5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제
'獨카셀 도큐멘타'의 파격

'공동체의 삶'이라는 주제로
아프리카·亞·남미 작가 1천명
카셀 도시 32곳에 작품 펼쳐

反유대 드러낸 작품 철거 등
호된 신고식 치르기도 했지만…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권위 내려놓은 예술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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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 논란 일으킨 타링 파디 작품 `민중의 정의`. 유대인 공동체 협회의 거센 항의 시위로 결국 철거됐다. [사진 제공 = 카셀 도큐멘타]

지난 19일 독일 헤센주 중소도시 카셀 프리드리히 광장에 도착하자 종이박스 위에 그려진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사람과 동물, 해골 그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중앙에 설치된 대형 걸개그림에도 괴물같이 그린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 권위의 현대미술제인 제15회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 출품된 인도네시아 예술가집단 타링 파디 작품 '민중의 정의'였다. 걸개그림에 쓰인 'The Expansion of Multicultural State Hegemony(다문화 국가 헤게모니의 확장)' 'Resistance Culture Movement(저항 문화 운동)' 등의 글귀를 보고 독재정권과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대형 벽화는 반(反)유대주의를 드러냈다는 비난에 휩싸였고 지난 21일 결국 철거됐다. 돼지로 묘사된 군인 같은 인물이 이스라엘 국가 정보기관 모사드가 쓰인 헬멧을 쓰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또 다른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이 악덕 유대인을 묘사할 때처럼 송곳니와 큰 코, 충혈된 눈에 중세시대 유대인의 신호 색상인 노란색 깃과 행커치프가 달린 양복을 입고 있다.

이스라엘 대사관과 독일 유대인 공동체 협회들의 거센 항의와 시위에 작품을 내리며 논란이 일단락됐지만, 카셀 도큐멘타의 명성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1955년 독일 예술가들이 나치정권이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과 자각에서 출발한 현대미술 행사이기 때문이다. 당시 화가 아르놀트 보데 카셀예술대학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예술로 치유하고 부흥하자는 취지로 카셀 도큐멘타 창설을 주도했다. 진보적인 작가들이 당대 지성과 정신을 연출하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며 세계 미술계를 이끌어왔다.

반유대주의는 올해 아시아인 최초로 카셀 도큐멘타 예술총감독에 오른 인도네시아 예술가그룹 루앙루파가 내세운 주제인 '룸붕(Lumbung)'과도 배치된다. 룸붕은 인도네시아어로 '공동의 쌀 헛간(Communal rice barn)'으로 유머, 관대함, 독립, 투명성, 충분함, 재건 같은 가치를 바탕에 둔다.


현대사회에서는 돈, 시간, 공간, 지식, 노동을 나누는 창고가 되어 공동체의 삶을 독려한다.

호된 개막 신고식을 치렀지만 올해 카셀 도큐멘타는 지난 18일 개막해 9월 25일까지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과 도큐멘타홀, 인근 박물관과 공원 등 32곳에서 100일간 여정을 이어나간다. '탈(脫)중심'을 지향하는 루앙루파가 선택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출신 작가 1000여 명이 토론을 통해 전시 장소를 직접 정하고 협업한 작품들을 자유롭게 펼쳤다.

주요 미술관인 프리데리치아눔 1층에는 이번 주제와 어울리는 집단 생활·작업 공간이 있다. 작가들이 준비한 소파와 해먹, 플라스틱 상자를 활용한 벤치에서 쉴 수 있다. 버려진 종이박스나 플라스틱 등을 활용한 친환경 예술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티켓 1장이 팔릴 때마다 1유로(약 1400원)씩을 숲 조성에 기부한다고 한다.

방문 시간대가 맞으면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작가들과 대화하거나 쓰고 싶은 글귀를 집처럼 꾸민 합판 구조물 벽에 붙일 수 있다. 수많은 메모지 속에서 한글로 쓰인 윤동주 서시 한 대목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 반가웠다.

2층에는 폴란드 작가 마우고르자타 미르가타스가 공동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드는 여성들의 협업 모습을 실로 짠 태피스트리 작품, 3층에선 호주 원주민 운동가 리처드 벨의 저항 회화가 걸려 있다. 백인들의 탄압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작가의 성향은 정치색을 숨기지 않는 카셀 도큐멘타의 특징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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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머시 펠리 대형 회화 `탄생` 아래 낙서 공간. 관람객들은 바닥에 놓인 검은 칠판에 마음껏 낙서를 할 수 있다. [사진 제공 = 카셀 도큐멘타]

헝가리 작가 터머시 펠리의 대형 회화 '탄생' 아래 바닥에는 검은 칠판이 놓여 관람객들이 마음껏 낙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감상 대상에 머물지 않고 쌍방향 소통을 갈구하는 예술 작품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인근 도큐멘타홀에 들어서면 아프리카 작가 그룹 와주쿠 아트 프로젝트(Wajukuu Art Project)가 만든 작품과 마주한다. 케냐 나이로비 빈민가 소리를 들으면서 녹슨 철재로 덮인 복도를 통과해야 한다.

쿠바 작가 그룹 인스티튜토 데 아르티비스모 한나 아렌트(Instituto de Artivismo Hannah Arendt)는 정부 기관의 검열을 비판한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1959년 이후 구금되고 투옥된 쿠바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머그샷(범인 구금 과정에서 촬영하는 얼굴사진)들을 붙인 나무 구조물 사이로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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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작가 그룹 반 누르그 컬래버러티브 아츠 앤드 컬처 작품. 관람객들이 스케이트보드장 위를 질주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카셀 도큐멘타]

태국 작가 그룹 반 누르그 컬래버러티브 아츠 앤드 컬처(Baan Noorg Collaborative Arts and Culture)가 만든 스케이트보드장 위를 질주하는 관람객들도 볼 수 있다. 낙농가와 벼 농장 간 물물교환 프로그램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보여준다.

도자기로 제작돼 먹을 수 없는 콜라, 호박, 우유, 생선 등을 진열한 슈퍼마켓 설치작품과 대조적으로 전시장 밖에서는 방글라데시 작가 그룹 브리토 아츠 트러스트(Britto Arts Trust)가 진짜 채소를 키우고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유기농 식품은 거짓말입니다'라고 쓰인 식재료 도자기들로 식품 산업을 비판하면서 손수 지은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어 방문객들과 나눠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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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팀 이끼바위쿠르르 `열대이야기`. 태평양전쟁과 식민주의 잔재를 탐구한 작품. [사진 제공 = 카셀 도큐멘타]

오토네움 자연사박물관에는 유일한 한국 작가팀 이끼바위쿠르르(Ikkibawikrrr)의 2채널 영상과 사진 25점이 설치돼 있다. 제주도와 미크로네시아 섬 등에 남아있는 태평양전쟁과 식민주의 잔재를 탐구한 작품 '열대이야기'다. 숲에 덮인 옛 군사시설은 전쟁의 상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일깨운다.

예산 4200만유로(약 573억원)가 투입됐으나 코로나19로 인한 준비 차질로 전시 규모가 예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관람객 시선을 확 사로잡는 기념비적인 작품은 없었지만 예술의 권위를 내려놓는 시도는 참신했다. 작품 위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만지고 낙서하는 행위를 허용한 '열린 예술'로 대중과 교감을 이끌었다. 주연화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부교수는 "예술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전시였다"며 "예술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가 공유해야 하는 것이라고 웅변했다"고 말했다. 스타 작가를 내세우지 않고 집단 창작에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해 김지연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은 "중고품 물물교환과 재활용 등으로 친환경 미래를 꿈꾸는 작가들의 협업이 돋보였지만 인상적인 작품은 거의 없었다"며 "작가들이 협업하는 태도 자체가 작품인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카셀(독일)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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