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황금배추, 미니 파프리카, 항암 브로컬리…K종자산업 다시 싹튼다 [스페셜 리포트]

입력 2021/02/14 15:45
수정 2021/03/03 10:57
◆ SPECIAL REPORT : K종자산업 현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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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위치한 충남대 대덕캠퍼스. 농업생명과학대학 한편에 7만6000㎡(약 2만3000평) 규모 농장이 위치하고 있다. 논도 있고 밭도 있고 비닐하우스도 여러 동 있다. 세계 최초로 배추 지놈 프로젝트를 완성한 임용표 충남대 원예학과 교수(64)의 안내를 받아 비닐하우스로 들어섰다.

한겨울이었지만 노란색 꽃이 만발해 있다. 마치 유채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니 배추꽃과 양배추꽃이었다. 일부 꽃은 흰색 종이로 감싸져 있다. 책에서만 봤던 식물 육종의 현장이다.

임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배추와 양배추, 무처럼 꽃잎 4개가 십자 모양으로 피는 십자화과 식물은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어서 자가 수분을 통해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A배추와 B배추를 교배해 C배추를 만들어내는 걸 바로 육종이라고 하죠. 이런 육종을 하려면 A의 꽃에 있는 수술 꽃가루를 B의 꽃에 있는 암술에 묻히면 됩니다. 물론 B의 꽃에 있는 수술은 제거해야겠지요. 또한 다른 꽃가루가 날아와 섞이지 않도록 교배한 꽃에 종이를 씌워 둡니다."

이렇게 해놓은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꽃이 지면서 씨주머니가 열린다. 이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종자다.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가며 새로운 종자를 만들고, 새로 만든 종자의 성질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연구해 가장 좋은 종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종자회사나 종자 연구자들이 하는 일이다.


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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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 [사진 = 매경DB]

이날 배추와 양배추꽃을 직접 보고서야 기자는 우장춘 박사의 논문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게 됐다. 지금도 여전히 우 박사를 씨 없는 수박을 처음 개발한 육종학자로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어서 1990년대 들어 교과서 내용이 수정됐다고 한다. 우 박사를 세계적인 육종학자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종의 합성'에 관한 그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1936년)이었다.

종의 합성은 유채꽃의 기원이 배추와 양배추라는 이종 식물 간 교배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증명한 논문이다. 배추와 양배추 꽃을 보기 전에는 이 말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실제로 두 꽃이 유채꽃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우 박사의 연구 배경이 이해됐다. 특히 종의 합성 이론은 당시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멘델의 유전법칙을 보완하는 이론으로 세계 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민승규 국립한경대 석좌교수의 설명이다. "1800년대 말부터 세계를 휩쓴 제국주의는 그 이론적 근거를 다윈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추와 양배추가 자연 교잡을 통해 유채라는 새로운 식물이 됐다는 사실을 우 박사가 과학적으로 입증한 것이죠. 이는 자연세계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만이 아니라 상생과 공생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인 학자였던 그가 한국으로 건너온 것은 1950년이었다. 이후 1959년까지 10년간 우 박사가 한국에서 농업과학연구소를 운영하며 이룬 업적은 짧은 글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임 교수는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당시만 해도 김치를 일본 배추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자 종자 공백이 생겼죠. 토종 배추는 사실 품질이 나빠 김치가 무르고 맛이 없었습니다. 우 박사는 귀국하자마자 배추와 무 종자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껏 맛있는 김치와 깍두기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 박사가 국내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학계로 진출하고 종자업계로 가면서 국내 종자산업이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 임 교수는 "흥농종묘 중앙종묘 서울종묘 청원종묘 같은 국내 대표 종자회사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데는 우 박사 공이 크다"고 말했다.


글로벌 자본에 흡수된 대표 종자회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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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박사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종자산업은 차원이 다르다. 종자에 첨단 바이오 기술이 접목되면서 부가가치가 더욱 커지고 있다. 무게당 가격이 금보다 비싼 종자가 수두룩할 정도다. 세계 종자시장이 글로벌 자본의 각축장이 되고 있는 배경이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종자시장을 호령하던 기업은 미국의 몬샌토·듀폰과 네덜란드 신젠타 등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수십조 원대 거대 인수·합병(M&A)이 연이어 진행되면서 지금은 미국 독일 중국 자본으로 재편됐다. 미국 다우케미컬과 듀폰이 합병을 발표하며 다우듀폰을 설립한 게 2015년이다. 2017년에는 중국의 켐차이나가 신젠타를 인수했고 2018년에는 독일 바이엘의 몬샌토 인수가 마무리됐다. 다우듀폰은 다시 2019년 농업 부문만 떼어내 코르테바를 설립했다.

글로벌 자본의 각축 속에 우리나라 종자회사들은 일찌감치 그들의 먹잇감이 됐다. 국내 업체들이 1997년 외환위기로 일시적 자금난에 빠진 틈을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우 박사 덕분에 기틀을 닦을 수 있었던 국내 4대 종자회사가 모두 해외로 팔려 나갔다.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는 바이엘(몬샌토)로, 서울종묘는 켐차이나(신젠타)로, 청원종묘는 일본 사카다로 넘어갔다.

글로벌 종자회사들이 국내 종자회사를 노린 건 이유가 있었다. 해외에 매각되기 전 국내 종자회사들은 그야말로 알짜였다. 자체적으로 좋은 종자를 많이 개발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종자회사 직원 급여가 삼성전자보다 훨씬 많을 정도였다.

국내 종자회사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 박사 역할 이외에도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종자 개발의 기본이 되는 유전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전자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종자를 개발할 여력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종자 유전자원은 26만4000점으로 미국(59만6000점) 인도(44만4000점) 중국(44만1000점) 러시아(31만1000점)에 이어 세계 5위에 해당한다.


어려운 시기 견뎌온 국내 종자산업


국내 4대 종자회사가 해외에 팔려나간 이후 종자산업은 어려운 시기를 지내왔다. 주요 농산물 종자를 수입하거나 막대한 사용료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청양고추 값에는 독일 바이엘에 내는 사용료가 포함돼 있다.


파프리카 종자는 대부분 네덜란드산이고 고구마와 양파 종자도 일본 비중이 70~80%다. 과일 쪽은 더 심각해 사과와 배 종자 자급률이 20% 선에 그친다. 귤은 종자 자급률이 3%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종자 수입액과 사용료 지급액을 합치면 연간 1500억원을 훌쩍 넘어선다.

외환위기에서 살아남은 종자회사도 주인이 바뀌는 고충을 겪었다. 현재 국내 1위인 농우바이오마저 2014년 농협에 경영권을 넘겼다. 고(故) 고희선 회장 유족들이 거액의 상속세 부담에 회사를 포기한 것이다. 흥농종묘와 중앙종묘 사업 일부를 인수하기도 한 2위 동부팜한농은 2016년 LG화학에 인수돼 팜한농이 됐다. 두 회사 모두 더 큰 조직으로 들어갔으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종자업계 관계자는 "농협은 농민에게 종자를 싸게 공급하려는 반면 농우바이오는 고품질의 종자를 개발해 해외에서 승부를 보고 싶어한다"며 "결과적으로 두 조직이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말했다.

팜한농 역시 전체 매출에서 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19%로 작물보호제(50%)와 비료(31%)에 비해 낮다 보니 사업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평가다.

나머지 종자회사 상황은 더 열악하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종자회사가 무려 2000개를 넘는다. 소규모 종자회사가 난립하고 있다는 뜻이다. 매출액이 100억원을 넘는 종자회사는 아시아종묘 코레곤 피피에스 한미종묘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이 밖에 수십억 원대 종묘회사 십수 개를 제외하고는 개인 사업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성장 잠재력 보여주는 기능성 종자


국내 종자업계가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최근 들어 골든시드프로젝트(GSP)와 같은 정부 지원과 종자업계 노력에 힘입어 일부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기능성 작물 종자 개발이 그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물로 배추가 꼽힌다. 천연색소 안토시아닌을 함유한 '빨간배추'가 한 사례다. 이 배추는 염증반응 감소와 동맥경화 억제 효과가 입증돼 수출이 늘고 있다. 일반 배추에는 거의 없는 베타카로틴 성분을 포함한 배추도 나왔다. 베타카로틴은 항산화 작용과 면역기능 향상 효과가 있다. 최근에는 베타카로틴 성분을 100배 이상 높인 하이베타 배추도 개발됐다. 항산화 물질인 라이코펜이 토마토보다 10배 더 많다는 황금배추도 시판되고 있다.

시력 유지 성분인 지아잔틴을 6배 정도 높인 미니 파프리카와 항암물질인 설포라판 성분이 포함된 브로콜리도 있다. 이뇨 효과와 함께 위와 장에 좋은 성분이 있는 오이도 나온다. 혈당 강하 성분이 함유된 고추도 있고 항암물질인 글루코시놀레이트를 함유한 양배추도 개발됐다.

연구기관 역시 활발하게 움직인다. 농촌진흥청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피부 주름과 지방간, 아토피 피부염 개선 등에 효능이 있는 기능성 콩 품종을 최근 개발했다. 전남 농업기술원은 숙면 유도와 진정 성분이 함유된 상추 품종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최첨단 바이오 기술인 유전자 가위와 유전자 편집 기술도 종자 개발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유전자 가위 업체 툴젠은 항산화·항노화 성분인 올레익산이 기존 콩에 비해 2배 이상 함유된 유전자 가위 콩 종자에 대해 미국 농무부(USDA)에서 유전자변형식품(GMO)이 아니라는 결정을 받았다. GMO 규제에 관계없이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유전자 가위는 GMO처럼 다른 유전자를 삽입하는 게 아니라 작물이 본래 지닌 염기서열 일부를 바꿔 변이를 일으키는 방식이다. 임 교수는 "유전자 가위·편집을 활용하면 신품종 개발에 평균 13년이 걸리는 GMO에 비해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미래는 개인 맞춤형 종자로 승부해야


종자산업을 키워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최병국 국립종자원 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종자는 농산물 생산과 농업소득 향상의 기본 토대입니다. 국민에게 양질의 먹거리를 제공하고 식량 안보를 지키려면 종자가 필수죠. 더구나 기술과 자본 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이어서 한국과 같은 수출형 경제에 딱 맞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첨단 바이오 기술이 접목되면서 산업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어 성장 산업으로 유망합니다."

다만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종자산업은 개인 맞춤형 종자 개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식품 패러다임이 '생산성 향상→품질 지향→안전성 제고→기능성 개발→맞춤형 추구'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맞춤형 농업으로 전환하는 것은 의료 분야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먼저 의학계에서는 개인의 병력과 유전정보, 체질을 확인한다. 그러면 개인이 어떤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지 미리 알 수 있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떤 영양소를 먹어야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농업계에서는 그런 영양소를 갖춘 작물의 종자를 개발해 대응하는 방식이다. 임 교수는 "육종기술 발전으로 과거보다 빠르게 특정 영양소를 함유한 품종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개인 맞춤형 품종이 종자시장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재배 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식물공장 발전으로 유효 성분이 규격화된 농산물을 생산하기가 수월해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농업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R&D)이 보다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류경오 아시아종묘 대표는 "코르테바의 연간 R&D 투자액은 1조2000억원으로 이는 우리나라 농업 분야 전체 R&D 금액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국내 종자회사 전체 매출액의 2배에 달한다"며 "종자 분야 R&D 확대에 전 국가적인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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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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