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고전문학 감상] 처음으로 광야를 마주한 박지원, 그는 왜 통곡했을까

입력 2021/11/12 09:38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
중국여행 중 광야 마주하며
벅찬 마음을 '통곡'으로 표현

갓 태어난 아이가 크게 울 듯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 인간은
경이로움에 놀라 눈물 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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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일부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중국을 여행하며 쓴 글인데, 그중 압록강을 건너 요양(遼陽) 지역에 가는 과정이 담긴 글을 '도강록(渡江錄)'이라 한다. 이 부분은 도강록 중에서도 '호곡장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우리말로는 흔히 '통곡할 만한 자리'라고 변역한다.

연암은 여행을 하다 드넓은 광야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크게 놀란다. 아마 조선에서는 먼 곳을 바라볼 때 늘 산이나 바다가 눈에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도착하여 난생처음 아무것도 시야에 걸리지 않는, 사방이 탁 트인 광활한 광야를 본 것이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며 둘러보아도 끝없는 지평선만 보이는 드넓은 벌판을 처음 마주한 것이다. 연암은 세상의 거대함 앞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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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한바탕 통곡하고자 한다.


의아한 일이다. 좁은 세상에 머물다 넓고 큰 세상을 마주하면 보통은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 우물 안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연암은 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통곡하고자 하니, 이에 의문을 느낀 동행이 그 이유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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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한 연암의 답변이다. 우문(愚問)에 대한 적절한 현답(賢答)이다. 통곡의 이유가 모두 '슬픔'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극한 감정이 극에 닿으면 모두 울음을 만들어 낸다고 하면서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상황을 설명한다. 아이가 좁고 어두운 엄마 배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넓은 세상으로 나오면, 억눌려 있던 마음과 생각이 트이면서 운다는 것이다. 이 울음의 이유를 슬픔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연암도 같은 이유로 울고 싶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보지 못한 사방이 확 트인 넓은 광야를 만나니, 생각과 마음이 모두 커지며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는 기쁨과 설렘, 희열과 기대감 같은 것들이 통곡으로 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계속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과정과도 같다.


사람들은 늘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만나며 살아간다. 특히 크고 결정적인 변화를 목전에 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입사를 간절히 원하는 회사의 취직 면접을 준비하고 있거나, 수능 시험을 코앞에 둔 고3 수험생들. 그들은 모두 연암이 말한 배 속의 아이와 같이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다.

날씨가 추워지고 두꺼운 옷을 꺼내다 보면,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 시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수능을 치르는 대부분의 고3은 곧 성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갈 준비를 한다. 언젠가부터 이 시험은 10대 학창 시절의 마무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성인이 되기 한 달 전쯤 처음 수능을 치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능은 성인이 되기 직전 마지막 고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험생들은 당연하게도 시험을 앞두고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시험에 대한 압박과 머지않아 어른으로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큰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는 불안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되는 것은 단순히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성인이 된 사람들은 보통 이전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경험해보지 못한 넓은 세상을 앞두고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옛 선조가 미리 일러둔 것처럼 새로운 세상에서는 설렘과 희열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 울음의 원인은 슬픔이 아닌 기쁨과 두근거림일 수도 있다. 조선의 연암은 어쩌면 자신의 여행기를 통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직전의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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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선 양주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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