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걸면 걸리는 그물 던지나…국민연금 서한발송에 기업들 초긴장

입력 2022/01/12 17:52
수정 2022/01/12 20:15
국민연금, 20여개 기업에 과거 불법행위 소명 요구

대표소송 수책위 이관 앞두고
재계, 서한발송 의도 놓고 의심

경영진, 중대재해법 형사처벌에
민사소송 금전손실까지 겹칠판

재계 "어떤일로 소송할지 몰라
기업들 공포심 더 커질 수밖에"
◆ 국민연금 서한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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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주요 주주로 있는 국내 기업 20여 곳에 안효준 기금운용본부장 명의로 공정거래위원회 담합 위반 여부 관련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질의서를 지난달 중순 발송했다. 사진은 국민연금 서울남부지역본부 앞을 시민이 지나고 있는 모습. [이승환 기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담합 관련 조치를 받았고 이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도 졌습니다. 해당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공시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사실확인을 하는 질의서가 국민연금에서 날아오니 당혹스럽습니다."

지난달 국민연금은 주요 주주 자격으로 국내 대기업 20여 곳에 대해 공정위가 과거 조사한 담합행위와 관련해 사실관계를 상세하게 재확인하는 질의서를 일제히 발송했다. 이 같은 질의서를 받은 기업 관계자들은 국민연금이 서한을 발송한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국민연금은 공정위 담합 외에 경영진의 횡령·배임 등과 관련해서도 질의서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경영진이 회사에 손해를 끼친 사안에 대해 주주 대표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며 "담합·횡령·배임 등은 국민연금이 주시하고 있는 주요 경영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이 질의서를 발송한 기업은 삼성물산, GS건설, 대우건설 등 주요 건설사를 비롯해 현대제철, SK네트웍스, 롯데하이마트 등 줄잡아 2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 담합 건이 아니더라도 3월 주주총회와 관련해 상세한 질의서를 받아든 기업들도 있다. 국민연금이 지분율 8%로 2대주주인 현대차도 최근 이메일을 통해 국민연금 측에서 현안과 관련한 질의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일부 현안에 대해 문의한 적은 있지만 (일부 보도처럼) 주주대표 소송 서한을 보낸 바는 없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이 지난달 발송한 질의서의 주요 테마는 '공정거래'였다. 이 같은 질의서를 과거에도 받은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몇몇 기업은 "작업장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나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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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7일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작업장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할 경우 경영진에게 징역형 등 법적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기업을 대상으로 질의서를 보낸 주요 목적이 '중대재해' '공정거래' 등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관여하는 것은 주주로서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측면에서는 이해되는 조치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장 평가다. 하지만 여기에 정치적 이유가 개입하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국민연금은 지난달 주주대표소송 결정권을 '원칙적 기금운용본부 결정, 예외적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 체제에서 수책위 단일 창구로 일원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수탁자 책임 활동 지침' 개정안을 국민연금 운용·관리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 상정한 바 있다. 기금운용위는 해당 사안 의결을 일단 보류했지만 조만간 이를 의결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수책위는 기금 운용에 대한 책임은 없이 소송 여부에 대한 결정만 내린다.


국민의 노후소득 극대화가 최대 목표인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수익률을 감안한 종합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반면 수책위는 노동자 대표 3인 등이 위원으로 참여해 수익률과 무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우려가 있다.

국민연금이 이번에 국내 주요 기업에 발송한 서한은 단순한 '사실관계 확인서'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례가 없던 일이라는 점과 더불어 국민연금이 수책위에 주주대표소송 권한을 넘기려는 결정을 눈앞에 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국민연금 주주대표소송은 소송 대상자가 대표이사 등 이사진인 민사소송"이라며 "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손해배상금을 기업이 아니라 대표이사 등 개인이 직접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국민연금 주주대표소송이 국내에서 전례가 없던 사안인 까닭에 기업이 체감하는 두려움은 더 크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해외 연기금의 사례를 보면 주주대표소송이 기껏해야 1년에 두세 건인 반면 국민연금 수책위는 내부적으로 1년에 20건가량을 소화하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어떤 기업이 어떤 사안으로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기업들의 공포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한 행사, 이와 맞물린 주주대표소송은 기업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소지가 크다는 것이 기업들의 우려인 셈이다.

한 전직 대기업 최고경영자는 "기업이 ESG(환경·책임·투명경영)로 이 같은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걸면 걸리는' 그물에서 빠져나기는 녹록지 않다"고 토로했다.

[한우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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