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중대재해법 탓에…정작 안전실험도 못할 위기

입력 2022/01/27 17:31
수정 2022/01/28 08:26
배터리·화학물질 실험서
사고발생땐 원장 책임 부담

중대법에 서류작업 급증
제품 출시일정 늦춰질판

공공부문도 반발 잇따라
"결과만으로 처벌 비합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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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여파로 전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제품 관련 안전실험에 급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건설장비, 생화학물질,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실험 과정에서 화재나 사상자가 발생하면 연구원장이나 관련 책임자가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험연구원 원장은 "각종 산업 기술이 실용화될 수 있도록 안전실험을 벌이는 것이 기관 의무이지만 중대재해법 시행을 맞아 움츠러드는 것은 사실"이라며 "각종 안전 조치를 증빙하기 위한 서류 작업에 몰두하느라 실험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이 기관은 평소 각종 산업과 관련한 안전성 평가나 화재 시험, 화학물질의 안전실험을 주관한다.


미생물이나 세균, 바이러스 같은 다양한 분야까지 인증을 주관하고 있어 안전 우려에 수시로 노출돼 있다. 이 원장은 "지난해에는 실험을 주관하다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며 "실생활에서 안전을 보장하려면 다양한 조건에서 실험해야 하는데 중대재해법 우려가 발목을 붙잡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중대재해법은 △사망자가 1명이라도 발생하거나 △2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10명 이상 발생하거나 △3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질병자가 10명 이상 발생하면 경영책임자 등을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중대재해법 처벌을 피하려면 사전에 충분한 안전조치를 취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한 서류 작업이 늘어나 실험 일정이 지체되거나, 안전을 제고하는 데 들이는 노력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할 경우 형사책임 불안감에 시달릴 수 있다. 서류 작업에 몰두하느라 관련 시험이나 인증이 늦어지면 국내 기업들이 2차전지나 ESS 관련 신기술을 개발해 국내외 시장에 신제품을 선보이는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평소 안전을 중시하는 공공기관에서도 사망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한국수자원조사기술원과 한국어촌어항공단 2곳에서는 사망사고가 처음 발생했다. 이들 기관에서 만약 올해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면 관리 소홀을 이유로 경영책임자가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던 상황이다. 전국에 수자원조사기술원이나 어촌어항공단처럼 작업 현장이나 건설 현장, 시설물을 보유해 안전관리등급 평가 대상이 된 공기업·준정부기관·기타공공기관은 99곳에 달한다. 이 중 연구시설을 보유한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안전성평가연구소,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전기연구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등은 상대적으로 위험한 실험이 잦아 인명사고가 발생하면 중대재해법이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산업계와 연구원 관계자들은 얼마나 안전 조치를 해야 경영책임자의 처벌을 피할 수 있는지가 모호한 가운데 처벌만을 강조한 중대재해법을 문제 삼는다. 고용노동부와 환경부는 수차례에 걸쳐 '중대재해법 해설서'를 내놨지만 업계에서는 안전 기준이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한 공기업 사장은 "안전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도 처벌당할 수 있다는 식의 입법은 크게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송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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