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역사 팩트체크] 몽골군이 두려워했던 강화도 갯벌

입력 2022/04/29 08:01
수정 2022/04/29 09:03
빠른 물살 위협적인 강화해협
조수간만의 차 9m로 무시무시

강화해협 건너도 펄갯벌이 난관
한번 빠지면 허벅지까지 차올라
말타고 이동하는 몽골군 속수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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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고려 궁궐 터(고려궁지).

1231년 살리타이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했다. 파죽지세로 내려온 몽골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했다. 얼마 뒤 화의를 맺고 몽골군이 되돌아가자 당시 고려 최고 권력자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최우는 왜 강화도를 선택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몽골군이 물을 무서워해 섬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제주도로 가야 하지 않을까? 몽골군을 상대로 강과 바다를 앞에 두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정말 못해서 멸망한 것일까?

"압록강을 건너온 몽골군이 강화도 바다를 건너오지 못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허네." 정찬주 작가는 소설 '단군의 아들'에서 물에서 싸우는 몽골군을 이렇게 표현했다.


압록강과 한강을 건너온 몽골군이 그 폭이 절반도 되지 않는 강화해협을 왜 못 건넜을까? 몽골군이 해자까지 갖춘 동유럽의 성을 함락하거나 서아시아의 큰 강을 건너 바그다드를 초토화시켰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강화도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Q. 강화도는 몽골군을 막는 데 어떤 이점이 있나요?

A. 강화도와 인천광역시 사이에는 강화해협(염하)이 있습니다. 폭이 넓은 곳은 1㎞ 정도이고, 좁은 곳은 불과 300m밖에 되지 않습니다. 육지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강화해협 북쪽 바다는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에서 각각 흘러내려온 물이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강화해협 북쪽(월곶)과 남쪽(황산도) 간에 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그 사이 흐르는 물은 매우 빠르게 흘러갑니다. 밀물 때 최대 유속은 초당 3.5m가 나올 정도로 빠릅니다. 또 수심이 얕아 썰물 때는 아예 곳곳에 바닥의 바위(암초)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대동지지' 기록을 보면 '강화해협은 조수가 들고 날 때 수세가 매우 급하고, 물밑 돌부리가 마치 깊은 낭떠러지 같으며 파도가 굽이치며 흐르는데 여울(유독 물살이 센 구간)과 같이 빠르게 흐른다'고 나옵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전투를 하는 것이 몽골군에게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화도 조수 간만의 차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수준입니다. 하루에 두 번, 여섯 시간마다 바닷물이 어느 순간 들어왔다가 빠져나갑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무려 9m에 달해 거의 3층 건물 높이가 물에 잠겼다가 바닥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따라서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때를 알지 못하면 드넓은 갯벌에 배가 걸려 옴짝달싹 못 합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강화도 동서남북 사방으로 거의 운동장보다 더 넓은 갯벌이 있었습니다.

강화의 갯벌은 물을 잔뜩 먹은 펄갯벌입니다. 빠지면 허벅지까지 차올라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정도가 됩니다. 물살이 빠르고 시시각각 변하는 강화해협을 건넌다고 해도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는 몽골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1256년 고려 사신 김수강이 원의 황제에게 몽골군 철수를 요청하자 당시 황제 쿠빌라이는 "고려가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면 철수하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Q. 강화도의 최씨 정권은 왜 무너졌나요?

A. 강화도는 몽골과 전쟁하는 39년간(1232∼1270년) 고려 왕조의 도읍이었습니다. 권력자 최우는 강화도에서 아주 오래 있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큰 궁궐을 지었고, 궁궐 뒷산 이름도 개경 궁궐 뒷산처럼 송악산이라 했습니다. 또한 최우의 집에는 수많은 소나무와 잣나무를 육지에서 옮겨와 정원에 심었습니다.

육지에서 몽골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던 백성은 강화도 조정에 세금까지 바쳐야 했습니다. 낮에는 무서운 몽골군이 쳐들어왔고, 밤에는 세금을 거두러 온 강화의 관리가 나타났습니다. 천혜의 요새 강화에서 편안하게 정원을 꾸미며 소극적인 전쟁을 하는 최씨 정권은 백성들의 신뢰를 점점 잃어갔습니다.

강화도에서는 자주 연회가 열렸습니다.


수놓은 비단과 화려한 조화로 장식하고 큰 항아리 여러 개에 이름난 꽃들을 꽂아 보는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연회에 참여한 악사와 일행이 1300여 명에 달해 각종 악기와 노랫소리에 천지가 진동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1270년 몽골군도 점령하지 못한 강화도는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 스스로 포기합니다. 허수아비 왕이었던 원종은 문신 관료와 몽골군의 도움으로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하지만 세금과 부역에 시달린 백성은 무너진 무신정권에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Q. 강화도는 이후에도 난공불락의 요충지가 되나요?

A. 고려시대의 강화도는 지금보다 작았습니다. 13세기 최씨 정권의 강화 천도 이후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 해안 저습지에서 대규모 간척 사업이 진행됐습니다. 지금 강화도에서 드넓은 평야가 보인다면 십중팔구 고려 때에는 바다였던 곳일 겁니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는 이렇게 만들어진 간척지가 현재 강화도 면적의 약 30%라고 합니다.

조선에서도 강화도는 유사시 피난처 역할을 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입니다. 청 태종의 군대가 침입하자 조선 임금 인조는 후궁과 왕자, 일부 관료들을 강화도로 보내고 곧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선봉 기병대가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 '김포' 쪽을 먼저 점령하자 반대 방향인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선조실록에 '지형이 실로 하늘이 내려준 험한 지역'이라고 표현된 남한산성은 수비에 적합했지만 강화도처럼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물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왕자들이 건너간 강화도는 놀랍게도 남한산성보다 훨씬 일찍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됩니다. 고려 말~조선 초 수백 년간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드넓은 갯벌이 사라졌으니 강화도는 일반 섬과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Q. 근대의 강화도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서양 세력에게 강화도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관문이었습니다. 188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했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함대는 광성보에서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강화도조약의 배경이 된 운요호 사건도 강화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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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 현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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