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역사 팩트체크] 갑신정변, 조선의 마지막 개혁 기회였을까

입력 2022/05/13 08:01
수정 2022/05/13 10:17
구식군대의 반발 임오군란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개혁정책은 힘을 못쓰게 되고

김옥균·서재필 등 급진개화파
갑신정변으로 개혁을 꿈꿨지만
백성들은 외세의 앞잡이로 생각
'3일 천하' 그치며 철저히 실패

갑신정변 좌절로 개화운동 타격
외교권 뺏기는 을사늑약 체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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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 시작된 우정총국. [사진 제공 = 조인]

구식 군대의 봉기(임오군란)를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청나라는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였다. 청나라의 간섭으로 개화 정책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급진개화파에게 청나라는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1884년 베트남 문제로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에 돌입하자 청나라는 한양에 주둔시켰던 군대의 절반인 약 1500명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급진개화파는 청나라가 조선에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판단하여 바로 거사(갑신정변)를 결정하였다. 우정총국(최초의 우체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급진개화파는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였다. 정변 다음 날인 12월 5일 새 정부 수립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그들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 실시를 계획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국민 국가가 건설되려는 순간이었다.

Q. 갑신정변은 왜 3일 만에 실패했나요?

A. 당시 급진개화파의 젊은이들은 과거에 합격한 지 얼마 안 된 20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중심인물인 김옥균이 34세로 유일한 30대였고, 홍영식 29세, 박영효 24세, 서재필은 19세였습니다. 유학과 서양 문물을 공부한 20대 중심의 급진개화파는 근대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에 비해 현실적인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조선 군대를 확실하게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말만 믿고 청나라 군대의 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청·프전쟁으로 군대를 일부 철수시켰던 청나라는 조선 내 정변 소식을 듣고 급히 프랑스와 잠시 휴전을 체결하고 군대를 조선에 보냅니다. 수천 명의 청나라 군이 궁궐로 쳐들어오자 150여 명의 일본 군대는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제물포(지금의 인천)로 도망쳤습니다. 일본에 군사적으로 크게 의지한 급진개화파에게 다른 카드는 없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백성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서양과 같은 근대 국가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서양 열강의 침략적 모습과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봤던 백성들은 급진개화파 역시 외세의 앞잡이로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은 일본군을 따라 제물포로 도망치는 급진개화파에게 돌을 던집니다.


충격을 받은 개화파 인물들은 세월이 흐른 뒤 독립협회를 세워 민중에 대한 계몽 활동(만민공동회 등)을 적극 전개합니다. 갑신정변 때 깨달은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통해 조선을 부강한 국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민중의 지지가 없던 갑신정변은 소수 지식인 중심의 '위로부터 개혁'이 갖는 한계를 보여줬습니다.

Q. 개화파 세력은 어떻게 됐나요?

A.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끝까지 고종 옆을 지키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막노동하며 미국 학교를 다녔습니다(나중에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방문 중이라 참여할 수 없었던 유길준은 귀국 후 체포되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됩니다. 8년간 가택연금 속에서 유길준이 쓴 글이 바로 미국과 유럽의 이야기를 적은 '서유견문'입니다.

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는 역모의 죄를 받았습니다. 김옥균의 부모와 형제들은 자결하거나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내와 딸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홍영식의 아버지는 흥선대원군 때 영의정을 역임한 홍순목이었습니다.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며느리, 손자와 함께 자결했습니다. 그의 동생 홍만식만이 이름을 홍정표로 바꿔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고위 관리 양반 주택은 경복궁 동쪽 북촌(지금의 북촌 한옥마을)에 모여 있었습니다.


북촌 언덕 위에 위치한 김옥균의 큰 집은 파괴되어 흉가로 변했습니다. 정승 집이던 홍영식의 집은 역적의 집이라고 철저히 파괴되고 사람이 살지 못하게 아예 연못까지 만들어집니다. 지금 헌법재판소(종로구 재동) 위치입니다.

갑신정변의 중심인물들은 집안 족보에서도 삭제되거나 수정되었습니다. 김옥균의 안동 김씨 '균(均)'항렬은 규(圭)로 바뀌었고, 홍영식의 남양 홍씨 족보에서 '식(植)' 항렬은 '표(杓)'로, 서재필의 달성 서씨 족보에서 재(載)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됩니다.

급진개화파의 정변으로 개화운동 전체가 약화됐습니다. 몇 년 뒤 온건개화파 김홍집은 지방관으로 좌천됐고, 호조참판 어윤중과 병조참판 김윤식은 파직되었습니다. 윤치호가 '한양에서 개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자가 없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시작을 갑신정변이라고 했습니다.

Q.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조선은 어떻게 됐나요?

A. 갑신정변 직후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어 조선에서 두 나라 군대가 모두 철수합니다. 하지만 임오군란에 이어 갑신정변 역시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마무리되면서 청나라 간섭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워싱턴에 부임했으나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고 주장한 청나라의 간섭으로 결국 1년 만에 국내로 돌아오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1905년 장지연 선생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갑신정변 실패로 개화운동이 타격을 받고 외교권마저 빼앗기는 을사늑약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개화파 견제가 없어지자 민씨 정권은 청나라의 비호 아래 부정부패를 일삼았습니다. 선혜청 제조 민영준은 관찰사와 수령뿐만 아니라 참봉, 감역 등 낮은 관직까지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관찰사 100만냥, 사또 자리는 10만냥'이라는 가격표가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였습니다. 결국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한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은 어리석게도 외국 군대(청나라)를 불렀고 톈진조약에 따라 두 나라 군대가 모두 조선에 들어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조선이 독립을 유지할 확률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나중에 러일전쟁이 나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것이죠. 청일전쟁 이전에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한 갑신정변이 조선에 마지막 개혁의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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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 현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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