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말랑말랑 경제학] 기준금리 0.5%P 인상을 '빅스텝'이라 부르는 사연

최병일 기자
입력 2022/05/13 08:01
연방준비제도 1987~2006년
앨런 그린스펀 의장 시절
0.25%P씩 금리 인상하면서
'베이비스텝'이라 이름 붙여
0.5%P 크게 올리면 빅스텝
0.75%P 올리면 자이언트스텝

타이밍 놓치지 않으려는 연준
이달 초 이례적 빅스텝 인상
원화값 하락, 금융 불안 우려
422260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파월 연준 의장. [AFP = 연합뉴스]

미국 중앙은행 수장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린다. 미국 달러화는 국제결제 수단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연준의 통화정책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막중한 자리에 무려 19년간 있었던 경제학자가 있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연준 의장을 역임했던 앨런 그린스펀이다. 그린스펀은 재임 기간에 주가 폭락, 닷컴 버블을 등 경제위기에 잘 대처하고 미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견인했다는 평가를 받아 '경제의 마에스트로'라는 칭송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그린스펀의 행적 가운데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도 있다. 임기 말 타이밍을 놓친 통화 정책이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하는 데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베이비스텝'이라고 하는 연준의 기준금리 정책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다. 그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통해 기준금리를 변경하는 단위를 0.25%포인트로 사용하면서 이것이 정례화됐다. 베이비스텝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중앙은행에도 영향을 미쳐 2000년대 이후 주요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변경할 때 0.25%포인트 변경하는 것은 암묵적인 규칙이 됐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저물가·저금리의 '뉴노멀' 시대에 들어서면서 시장 이자율은 1980년대에 비해 큰 폭으로 하락했다. 절대적인 금리 수준이 축소되면서 실물경제에 충격을 가하지 않고, 점진적인 통화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베이비스텝(0.25%포인트)이 금리 정책의 관례로 자리 잡았다. 0.25%포인트를 넘어서는 금리 정책은 이례적인 일로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다.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조정할 때는 '빅스텝', 0.75%포인트 변경할 때는 '자이언트스텝'이라고 부른다.

그린스펀이 의장으로 재임하던 2004년 연준은 미국의 물가 상승과 경기 과열을 조정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10차례에 걸쳐 총 2.5%포인트 인상했다. 중앙은행의 강력한 금리 인상 정책에도 불구하고 같은 기간 미국의 채권시장 10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은 4.7%에서 오히려 3.9%로 하락했다.


이처럼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해도 시중금리가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하락하는 현상을 '그린스펀의 수수께끼(Greenspan's Conundrum)'라고 한다. 경제 전문가들은 2000년대 초 그린스펀이 물가를 안정시킬 긴축 통화 정책의 타이밍을 놓쳤고, 이는 중앙은행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고 평가한다. 연준이 경기 과열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배경을 가진 베이비스텝의 예외적인 사례가 지난 4일 미국 연준의 FOMC를 통해 나타났다. 이는 22년 만에 처음으로 기준금리 변동폭이 베이비스텝 수준을 벗어나 급격히 인상된 것이다. 미국 연준뿐만 아니라 홍콩,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중앙은행들도 지난주 0.5%포인트가량 금리를 올렸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오랜 기간 불문율로 지켜온 원칙에서 벗어난 이유는 뭘까.

2007년 이후 미국 연준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의 재정위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실물경제가 크게 후퇴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자 저금리 정책을 지속해왔다. 그런데 2020년 하반기부터 금융시장에 늘어난 막대한 유동성으로 인해 주식, 원자재,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이어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원유, 천연가스, 곡물, 철광석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다. 결과적으로 각국 물가지수가 중앙은행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특히 지난 3월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8.5% 상승해 최근 40년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일반인들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인지할 만한 가파른 상승세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전문가들 역시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려면 최소 연내 2~3차례 빅스텝을 더 진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최근 자산·원자재 시장의 급격한 가격 상승은 과거 그린스펀이 금리 인상 타이밍을 놓쳐 자산 시장 버블을 형성했던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그린스펀의 후배 의장인 제롬 파월을 비롯한 연준 이사들은 '그린스펀의 수수께끼와 같은 상황이 재발하지 않을까'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는데 연준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지난 4일 연준이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하고 나서도 2~3차례 더 강도 높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자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다. 연준의 긴축 횡보로 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 원화 가치는 크게 하락했다. 연준의 빅스텝 발표 직후인 6일 외환시장에서 원화 가치는 달러당 1272.7원으로 마감했다. 이는 코로나19로 외환시장이 큰 변동을 겪은 2020년 3월 이후 2년2개월 만에 최저치로 하락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을 초과할 경우 해외 자본이 급격히 유출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연준이 올해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면 글로벌 투자 자산 가운데 안전자산인 달러화 수익률이 크게 상승하므로 달러화에 대한 투자 수요가 증가한다. 따라서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신흥국에 투입된 자본이 미국으로 대거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2018년과 2019년 한미 간 금리 역전이 발생했음에도 눈에 띄는 자본 유출은 없었다. 전문가들은 올해 연준이 금리를 대폭 인상해 한국과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나면 자본 시장의 반응은 과거 금리 역전 때와는 다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18년에 비해 이번 연준의 긴축 정책은 강도가 더 높고, 미국 경제의 회복세가 한국보다 견조해 금리마저 역전되면 외국인 자금이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원·달러 환율이 1300원까지 상승할 경우 해외 자본 유출은 더 확대돼 국내 물가 상승을 가속화할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거시경제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은행 역시 향후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에 발맞춰 인상할 가능성이 높다. 금리 인상과 유동성 축소가 강도 높게 진행되면 국내 자본시장이 위축될 가능성도 크다. 실제 지난주 연준이 빅스텝 발표를 한 이후 국내 주식시장에서 상장을 준비하던 기업들이 기업공개(IPO)를 철회했다. 또 금리 인상과 유동성 축소가 급격히 진행될 경우 신용 경색으로 이어져 최근 늘어난 가계부채 상환에 대한 부담이 커질 수 있다.

422260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최병일 경제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