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역사 팩트체크] 고려시대 관통하는 무신정변…文武차별이 빚은 역사

입력 2022/06/10 08:01
무신 차별 심했던 고려 초기엔
왜 정변 없었나

고려 초기 차별 더 받았지만
당시에는 무신들의 힘 부족

거란·여진과 전쟁 과정서
군대 규모 갈수록 커지며
무신 영향력 서서히 커져
무신정변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 장군의 수염을 불태워서 일어난 사건일까? 만약 그때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지 않았다면 무신정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직접적인 원인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모든 역사적 사건이 누군가의 실수로 일어난 이야기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왜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켰을까? 무신정변이 그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Q. 무신에 대한 차별이 그렇게 심했나요.

A. 고려에서 무신을 뽑는 무과 자체가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습니다. 무신 뽑는 시험이 없는데 무신은 어떻게 뽑았을까요? 시험 없이 추천으로만 군인이 되고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 최고 권력자가 됐던 이의민입니다.


이의민의 어머니는 옥룡사라는 사찰의 노비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부모 한쪽이 천민이면 그 자식도 천민이 됐습니다.

이의민 역시 천민으로 태어났습니다. 천민이었던 이의민은 키가 크고 팔의 힘이 세서 싸움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이의민은 군인이 됐고 싸움을 잘한다고 총애를 받아 단시간에 고속 승진을 합니다. 하지만 천민이었던 이의민은 그 당시 대부분 무신이 그렇듯 한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좋은 문벌귀족 집안의 문신들은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신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관복은 입었으나 무식하다고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고,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 사건을 바라봐야 합니다.

무신들은 힘든 전투를 이끌면서도 총사령관은 될 수 없었습니다. 고려에서 형식적으로 큰 군대의 총사령관은 문신이어야 했습니다. 무신들은 실제 전투에 큰 기여를 했으나 역사에 크게 남지도 못한 것입니다. 또한 무신들은 제한이 있어 정3품까지밖에 승진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고려에서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도병마사'라는 회의 기구가 있었습니다. 도병마사는 2품 이상의 관리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군사 문제를 최종 결정하는 도병마사에 정작 무신은 단 한 명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급 군인들의 불만 역시 많았습니다. 고려의 중앙군 2군 6위의 병사들은 토지를 지급받는 직업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 전시과 제도의 토지 부족이 심해지자 문신들은 가장 만만한 군인들에게 지급할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8품의 이의방, 이고 등이 무신정변을 시작할 때 가장 적극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는 건국 초기 독자적인 군대를 갖고 있던 각지의 호족세력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유교를 내세웁니다.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고 유학자 문신을 우대하는 문치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고려에서 무신 차별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Q. 차별은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때 무신정변이 일어난 이유가 뭔가요.

A. 고려 초기부터 무신 차별은 많았습니다. 아니, 더 심했고 많았습니다. 고려의 토지 제도인 전시과에서도 무신들은 차별받았습니다. 같은 5품 관리여도 문신에 비해 무신이 토지를 적게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중기 문종 때 경정전시과를 시행하면서 무신에 대한 차별이 많이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왜 무신정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차별을 받았으나 힘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신정변이 일어났던 시기는 달랐을까요? 다릅니다. 고려는 건국 초기 1~3차로 계속되는 거란의 침입을 겪습니다. 2차 침입 때는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기도 합니다. 이어서 고려 중기에는 지금의 함경도 쪽에서 여진과의 전쟁이 계속됩니다. 윤관이 이끄는 별무반 군대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던 시기였습니다. 그 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면서 고려와 전쟁 직전까지 갔습니다. 거의 200여 년 동안 고려는 북방민족과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을 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세운 대책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전쟁 위험에 대비해 군대를 대폭 늘렸겠죠. 그 결과 고려 초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신정변 직전 무렵에 고려의 군대는 그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군대의 힘이 강해지면 군대의 지휘관인 무신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럼에도 그 이전에 그러했듯 문신들은 여전히 무신들을 무시하고 심한 행동을 했습니다.


거란·여진과 계속되는 전쟁에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내란까지 심했던 시기에 무신의 역할이 중요했으나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았기에 갈등이 심해진 것입니다.

문벌귀족 집안의 문신들은 가장 경계한 라이벌 세력이었던 묘청의 서경 세력을 진압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며 스스로 개혁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스스로 개혁하지 않다가 결국 외부의 힘 무신들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당시 왕이었던 의종 역시 문신과 무신, 환관 세력 사이에서 권력의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환관 출신의 문신 한뢰(5품)가 3품의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일이 일어났을 때도 문신과 환관 세력을 의식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합니다.

Q. 무신정변 이후 고려는 어떻게 변화하나요?

A. 역사학계에서는 무신정변을 기준으로 고려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 그만큼 무신정변이 고려를 크게 바꾼 사건입니다. 먼저 무신정변 이후 하층민의 의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천민 출신이었던 이의민이 최고 권력자에 올라 왕에게도 함부로 할 정도가 됐다는 소식에 고려의 하층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 형제의 난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계속 봉기가 일어납니다. 전주 관노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 이연년의 난이 있었죠. 이후 고려 정부는 할 수 없이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던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차별받던 향, 부곡, 소의 마을들이 일반 군현으로 바뀌었고 점차 향, 부곡, 소는 줄어들게 됩니다(조선시대로 들어가면 향, 부곡, 소는 거의 소멸됩니다). 개경에서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정중부의 난 이후 천민에서 고위 관직이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고 말했는데 하층민들이 실제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하층민의 봉기 대부분은 실패했으나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하층민에서도 점점 권력을 잡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무신 권력자들은 문벌귀족과 가깝던 불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눌의 신앙결사운동을 지원했고 훗날 조계종의 불교 세력이 성장하게 됩니다. 무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동국이상국집을 썼던 이규보처럼 문신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몇 년째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결국 관직을 원하는 문신들은 권력자 무신에게 철저히 충성해야만 관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우는 '서방(書房)'을 설치하여 문신들을 회유하고 무신정권의 약점을 보완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서방 출신들이 사실상 나중에 등장한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초기 모습입니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은 문신 중심의 고려 시스템을 존중하지 않았고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병을 유지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대규모 토지 대농장을 소유했고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전시과 제도가 사실상 붕괴되고 국가 재정이 크게 악화됐습니다. 결국 법을 지키지 않는 권력자가 다수가 되는 시대에 이르러 고려는 점점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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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前 이화여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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