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임원도 아닌데"…동종업계 이직금지에 직장인들 부글부글 [스물스물]

차창희 기자, 박홍주 기자
입력 2021/03/11 09:51
수정 2021/03/24 15:06
동종업 이직 금지하는
근로계약·서약서 강요

"임원도 아닌 저연차인데…"
"커리어 어떻게 쌓나" 불만

법원 "적절한 균형 찾아야"
입증 책임은 사업주 측에
근로자 압박 도구로 악용되기도
국내 한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A씨는 최근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인사팀과의 면담 과정에서 퇴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회사 측이 제시한 퇴사전 서약서에는 '퇴직 후 2년 이내 동종업계엔 취업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그동안 일해 온 경력을 살리려면 동종업계로 재취업 하는 방법 밖에 없다"며 "입사 시 계약서도 아닌 퇴직 서약서를 써야한다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들의 '동종업계 이직 금지' 요구에 젊은 이직자들이 떨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평생 직장'이 사라진 시대, 사회초년생들을 중심으로 퇴직·이직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법에도 없는 서약을 강요하는 기업의 갑질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26일 매일경제 취재 결과 적지 않은 기업들이 근로계약서, 취업규칙 등에 '동종업계 이직 금지'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확인됐다. 경업 금지 조항으로도 불리는 이 내용은 반도체, 핀테크 등 영업, R&D(연구·개발) 정보가 중요한 업종에서 많이 활용된다. 다수의 회사 측은 "고유의 영업 기밀 등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설명이다.

현장에선 법에 없는 내용을 넣거나 법령의 범위를 넘어서 노동자에게 지나친 제약을 가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렸다. 앞서 대법원은 판결을 통해 "(경업 금지 조항이) 헌법상 보장된 근로자의 직업 선택의 자유, 근로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경우엔 무효"라며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용자의 이익, 근로자의 퇴직 전 지위, 경업 제한의 기간과 직종 등 기준을 들어 사안마다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사업주 측의 '보호받을 권리'와 노동자의 '노동권의 자유' 사이에서 중요성을 따져봐야 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회사가 노동자에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조현민 노무법인 지산 소속 노무사는 "경업 금지 조항은 영업 비밀을 비롯한 사용자의 이익과 노동자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비교하여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판결 취지"라고 설명했다.

노동자 입장에선 회사 측이 해당 조항을 악용하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보통 노동자들은 동종 업계 이직을 통해 커리어를 쌓는다. 하지만 A씨의 사례처럼 임원급이 아닌 영업 기밀 유출 우려가 적은 저연차 직원을 대상으로도 퇴직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강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 지난해 한 해충퇴치 업체는 별도 팀을 활용해 자사의 퇴직자들을 사찰하고, 이를 근거로 경쟁업체 취업자들에게 소송을 제기했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다. 사업주 측에서 무리한 소송을 불사해서라도 근로자들을 압박하는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 사회초년생 A씨는 "최근 국내 대기업에서 퇴사할 때 경쟁사 취업 금지 등이 적힌 '보안 서약서'를 작성하라는 말을 들었다"며 "해당 조항에 따르면 회사의 주요 기밀을 아는 직원이 대상인데 2년차 직원에까지 강요해 당황스러웠다"고 전했다.

기업 측은 "고유의 영업 기밀 등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실적으로 근로자가 핵심 사업 기밀을 가지고 이직해 회사에 해를 끼쳤다는 사실의 입증 책임을 회사 측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영업 기밀을 빼돌린 사례도 있다. 과거 한 국내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던 BM(브랜드 매니저)들이 중국 화장품 기업의 거액 스카우트를 받고 이직한 사례가 있었다. 당시 중국 기업 측은 억대 연봉을 제공하며 이들을 대우해줬지만 2년 만에 상품 개발 관련 정보를 빼낸 다음 계약을 해지해버렸다. 대규모 인력이 이동해 영업 비밀 침해 소송이 진행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법적 분쟁도 한 사례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자유로운 이직을 통한 커리어 개발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무법인 대상의 손보영 노무사는 "과거 애플, 구글 등 미국 실리콘밸리의 대표 기업들은 인력 스카우트를 자제하자고 담합했다는 혐의로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며 "자유로운 근로 계약과 이직을 막는 것이 시장의 공정성을 해친다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경업 금지 조항을 활용해 이직을 제한하고 '몸값'을 낮추는 국내 분위기와는 상반된다는 지적이다.

사업주의 영업 기밀 등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기밀 유출 우려가 적은 저연차 직원들을 대상으로도 기본권인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양태용 법률사무소 여민 대표 변호사는 "기술은 기업의 자산이므로 경업 금지 조항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사측이 우월적 지위를 통해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제한해야 한다"고 밝혔다. 노무법인 대상의 손보영 노무사는 "근로계약서에 경업 금지 조항이 있다고 해서 이직 시 무조건 손해배상 위험이 따르는 건 아니라는 점을 노동자들이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차창희 기자 / 박홍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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