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퇴직 증후군' 앓고 있나요

입력 2021/04/20 17:01
수정 2021/04/20 17:13
가장 쉽고도 어려운 처방
'과거의 나'를 잊어버려라
'현재의 나'를 받아들여라


대기업 임원 지낸 A씨에게

지위·역할 한번에 잃어버리고…화려했던 인간 관계도 무너져
직장 성공만 보고 내달린 인생…명함의 상실은 정체성의 상실

불안·초조했다 분노하고 좌절…대부분의 퇴직자가 겪는 심리
길게는 2년도 가는 이런 혼란…자기답게 사는 법 먼저 배워야

잠시 걸음 멈추고 더 성찰해야…쓸데없는 자만·허영심 버리고
또다른 역할·정체성 만들어야…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도 필수
◆ 매경 포커스 ◆

380640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뱅크]

"저녁에 집에 와서 아빠가 좀 쉬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거 같다고 하니, 우리 딸내미가 막 울더라고요. '너 왜 우냐?' 그랬더니, '아빠가 퇴직하면 자기 학원에 못 다니느냐, 집 이사 가야 하냐'고 하더군요. 그때가 제일 가슴 아프고 마음 아팠죠." - 대기업 상무 B씨 -

그동안 고생 많았네

"출장 갔다가 공항에 도착해서 전화기 켰는데 딱 전화가 오더라고요. 우리는 전달받으면 바로 그 시간부터 아웃이에요. 직원에게 그 자리에서 법인카드 꺼내 주고, 짐은 직원이 나중에 부쳐주더라고요. 많이들 그렇게 해요."(대기업 상무 A씨). 중년기에, 소위 우리가 회사에서 '잘렸다'고 표현하는, 갑작스럽고 강요된 퇴직 장면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순간적인 놀라움을 넘어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처량하고 부끄러운 내 신세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나. 좋은 학벌에 좋은 직장에서 소위 '잘나가던' 사람일수록 갑작스러운 퇴직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들은 갑작스러운 퇴직으로 30여 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쟁취한, 성공과 성취의 상징인 지위와 역할을 잃어버렸다. 그 지위를 통해 누릴 수 있었던 자신감과 통제감 그리고 다양하고 화려한 인간관계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과정에서 막 화가 나고 밤에 자주 깨거나 울화통이 터져서 집에 있을 수 없는 분노, 고통, 원망, 배신감을 경험한다.

또 이들에게 직장생활에서 성공이 유능함의 상징이었다면, 퇴직은 동전의 양면처럼 경쟁에서의 패배와 무능함을 의미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괜찮은 삶을 살았음에도 강요된 퇴직 앞에서 이들은 한없이 수치스러워한다. 그 결과 십수 년을 함께 일했던 직원들조차 모르게 도망치듯 조직을 떠난다. 출근 시간 이후 아파트에서 만나는 주민의 시선에도 괜히 위축되고, 대낮 마트에서도 주변 사람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다. 친한 친구, 심지어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에게도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의 초라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직장에서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들에게 임원이란 아무나 될 수 없는, 선택받은 자들의 몫으로 자부심의 근원이자 자신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명함의 상실'은 정체성의 상실, 곧 자기 자신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래서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가 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여기서 백팩 메고…. 남들이 나 보면 뭐라 그럴까, 참 처량한 거야."(중견기업 부사장 B씨) 퇴직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사건이다.


퇴직 이후 가정도 너무 낯선 공간으로 돌변한다. 남편과 아내 모두, 긴 시간 동안 하루 종일 부대껴 본 경험이 없었기에, 그 어색함이 민망하고 불편하다. 삼시 세끼 해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무능한 남편을 둔 아내에게도, 그런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남편에게도 이 상황은 쉽지 않다. 말은 쉬어도 된다고 하지만 행동이나 표정은 짜증 나 보이는,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 같은 가족들의 작고 사소한 말과 행동에서도 서운함을 느낀다.

권토중래를 꿈꾸지만

퇴직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이자 기대는 당연히 재취업이다. 과거만큼 높은 지위, 과거와 비슷한 안정적인 수입을 하루빨리 회복함으로써 나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주변에 증명하고 싶어 한다. "좋은 자리 구해서 보란 듯이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죠."(대기업 상무 C씨). 이들은 권토중래를 꿈꾸고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잘나가던 '과거의 나'를 회복하고 싶어 할수록 '현실의 나'는 초라해 보인다. 여전히 조직에 남아 그럴듯한 지위와 역할을 가진 동료들과도 비교된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오히려 정확한 현실 인식과 현실 수용을 더 어렵게 만든다. "난 아직도 현역에 대한 의지도 있고, 여전히 기회가 있다고 보거든요."(대기업 상무 D씨). 재취업 가능성이 희박한 현실을 고려할 때 퇴직이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이들의 기대는 그저 선언적인 의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아울러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후배들이나 지인들에게 연락해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나를 피하는 건가? 그럴 리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치지만 그래도 망설여진다. 이들은 서서히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당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피하고 숨으면서 결국 소외되고 만다. 퇴직은 이들을 소리 내 울지도 못하는 중년 남성의 모습으로 남게 했다.

380640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퇴직 이후 나타나는 심리 변화

어느 날 느닷없이 닥친 퇴직을 경험한 중년들은 대부분 유사한 심리적 경험을 했다. 물론 나는 특별한 경우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이들은 퇴직 후 인지적 마비, 정당화, 의기소침, 불안·초조, 분노, 좌절, 패배감, 수용, 희망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심리적 변화 과정을 거친다. 첫 단계는 인지적 마비다. 인지적 마비는 퇴직한 첫날 아침 갈 곳이 없어진 낯선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 일상 속에서, 존재감이 사라져 텅 비어 버린 시간을 보내면서 극심한 충격에 휩싸여 머리가 멍해지는 듯한 인지적 마비 상태를 경험한다. 이어 시간이 흐르면서 '그동안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간다'와 같은 정당화와 이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무 할 일 없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창피하며 의기소침해진다.

반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재취업이나 창업을 시도하지만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힌다. 이러한 반복된 실패는 초조함을 더하고 그런 초조함은 '조직을 위해 내 청춘을 바쳤는데 그놈들이 나를…'과 같은 분노를 야기한다.

"은퇴해서 한 1년 반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돼요. 자기가 좋았을 때를 회상하면서, 직장 생활에서 승승장구할 때, 자꾸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거죠."(대기업 상무 E씨)

이러한 과정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2년 이상 지속된다. 그리고 정말 중대한 기로는 퇴직 이후 2~3년의 시간이 경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시기에 좌절하고 패배감에 빠지는지, 아니면 서서히 혼란을 극복하고 수용과 희망의 단계로 나아가는지 갈림길에 서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자기답게 사는 법을 이해하고 배우는지다. 자기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잘했던 것, 좋아했던 것 등을 찾아 열심히 그것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이 열릴 때까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계속 두드리는 거죠."(대기업 상무 F씨)

당장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고, 상당한 인내심과 겸손함으로 하나의 열정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꾸준히 해보는 게 중요하다. 자기답게 사는 법은 단순히 말이나 생각으로 찾아지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이 보는 퇴직 후 적응

심리학자 입장에서 퇴직 후 적응을 위해 중요하게 고려할 사항을 제시하자면, 이 모든 일에는 시간의 시련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다. 잃어버린 명함과 역할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퇴직자의 삶은 기본적으로 불안을 동반한다. 그래서 불안정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은 어쩔 수 없이 최소한 2년 이상, 적어도 3∼4년의 물리적인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조급함을 조절해 나가는 것이 출발점이다.

또 새로운 타이틀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낯설지만 스스로 삶의 의미를 자문하고, 새로운 자극을 위한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인생의 전환점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등 새로운 후반전의 길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또는 내가 선택한 활동들을 탐색해야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역할과 정체성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데'라는 쓸데없는 자만심과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과거 자신의 명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현재 내가 혼자 힘으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스스로 세상에 증명해야 한다. 퇴직과 더불어 경기의 규칙도 바뀌었다. 세상 인심이 그렇다. 겸손한 마음으로 새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도 행복한 퇴직 생활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60년에 걸친 종단 연구를 집대성한 하버드 그랜트 연구에서도 중년 이후 삶에서 정신 건강의 제1 지표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였는데, 여기서 핵심은 그 숫자 안에 배우자가 포함돼 있는지였다. 중년기 이후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평소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대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의 상황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이 있어야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큰 결정을 서로 믿으면서 할 수 있게 된다.

퇴직했다고 위축되지 말고 꾸준히 사람을 만나고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다. '남자는 길을 잃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사회언어학자 데버라 태넌의 말이다. 퇴직자들은 자신의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점점 더 높은 자기만의 벽을 쌓고 숨는다. 힘들고 외로울 때 혼자 있고 싶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누군가 함께해야만 해법이 보인다는 무수한 심리학 연구 결과들이 있다. 그리고 기꺼이 도움을 청할 용기도 필요하다. 행복은 어디서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의 문제라고 하지 않았나.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도 정말 많이 남아 있다.

380640 기사의 2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구자복 트라이씨 심리경영연구소 공동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