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日경제도약·中의 꼼수·원숭이 부대...6.25 닮은꼴 임진왜란

입력 2020/08/22 06:01
수정 2021/04/21 11:10
[한중일 톺아보기-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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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함락됐던 평양성을 조·명 연합군이 탈환하는 장면을 그린 `평양성 탈환도`. 평양성 전투후 이여송 휘하의 명군이 적의 수급으로 공적을 다투는 과정에서 벤 머리의 절반은 조선인들 것이었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은 명국 정벌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여러번 징후가 있었지만 안일하게 대처한 조선의 국토는 속수무책 유린 당했죠. 명군의 참전은 도움이 됐지만 군의 지휘권이 사실상 명에게 넘어가면서 주권도 침해됐습니다. 선조는 명나라 일개 장수에게 면박을 당했고, 권율 장군은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에게 허락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곤장을 맞을 뻔하기도 합니다. 명군은 전쟁과 휴전기간 까지 8년여에 걸쳐 조선에 주둔하며 약탈, 강간, 살인 등 온갖 범죄를 일으키며 조선민중을 괴롭혔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기습 남침을 단행합니다.


경무장 상태로 38선을 지키던 국군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상대가 되지 못했고 휴일과 부대원들의 외박 등 우연치 않은 악재까지 겹치며 개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연합군이 참전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집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연합군과 중공군은 정전협정을 체결하지만 협상 테이블에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시기와 성격, 참전국 등은 다르지만 400여년이란 긴 시간차가 있는 두 전쟁-임진왜란(임란)과 6.25-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고 일컬어 지고 있습니다. 지역 질서의 판도가 바뀌는 대규모 국제전이었다는 점, 일본과 중국이 이득을 봤다는 점, 신무기가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 한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전쟁인데도 조선(한국)이 아닌 외세가 주도권을 쥐게 됐다는 점 등이 그렇죠.


日, 한반도 전쟁때마다 경제발판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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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때 일본에 끌려간 이삼평은 일본이 자랑하는 아리타야키`(有田燒)의 시조다. 일본 사가현 아리타에서는 매년 5월 이삼평비 앞에서 `도조(陶祖)제`를 열어 `도자기의 신` 이삼평을 기린다

임란이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유는 당시 잡아간 조선 도공들 덕에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꽃피웠기 때문입니다.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납치된 조선 도공은 최소 3만에서 최대 1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죠. 이때 전파된 도자기 제조기술은 일본 경제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유럽에서 도자기는 '차이나'로 불리며 본래 중국산이 가장 유명했지만, 17세기 부터 점점 일본제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도공들이 대륙의 도자기 기술을 일본열도에 이식해줬기 때문이었죠.

일본은 납치해온 조선 도공들의 도자기 생산덕에 중국제 수입량을 80%나 줄일수 있었고 1658년 경에는 유럽·중동을 상대로 한 도자기 수출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일본산 도자기의 점유율 증가는 세계 시장에서 '재팬'이란 존재를 각인시켰고 일본의 무역활동에 이바지 했습니다. 17세기 이래 번성하던 일본의 무역과 경제 성장은 에도 시대의 번영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19세기 메이지유신과 대도약의 밑거름이 됐다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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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로 인한 `조선 특수`는 패전국 일본의 경제 부흥으로 이어졌다

6.25도 일본 경제가 도약하는 발판이 됐습니다. 패전 후 침체돼 있던 일본은 미국의 병참기지로서 전쟁물자를 공급하며 불어닥친 '조선 특수' 바람으로 경제부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일본경제기획청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일본이 조선 특수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약 40억 달러로, 당시 일본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6.25 발발 소식을 들은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이제 일본은 살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며, 그의 외손자 아소 타로는 수년전 공식석상에서 "운 좋게 한국전쟁이 일어나 일본 경제 재건이 빨라졌다"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죠. 일본의 자동차 수출도 전쟁 발발 전후 1년 새 400배 이상 늘어 도요다 에이지 전 도요타자동차 회장이 6·25를 "구제의 신(神)"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中 "北도와 美에 승리"...한국에게도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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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 총사령관 이여송의 초상(좌). 명군은 평양성 탈환 및 울산성 전투를 제외하고 대부분 전투에서 소극적이었다. `징비록`에는 명군이 싸움을 꺼렸고 고의로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줬다는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평양성과 대동강의 모습(우·19세기말)

명이 조선에 출병한 것은 선조의 요청이나 의리 때문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명이라는게 분명한 상황에서 전적으로 자국의 안보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죠. 이왕 전쟁을 해야 한다면 자국이 아닌 남의 영토, 그것도 70%가 산지인 조선땅에서 싸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겁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 즉 해양세력의 진입을 막는 완충지대로 인식해 왔기에 한반도에 적대세력이 들어서는 것만은 꼭 막으려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판단 과정은 마오쩌둥의 6.25 참전 결정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중국은 임란때 조선-명 동맹과 6.25때 북-중 동맹을 자주 연결 지으며 북한과의 혈맹을 강조해 왔습니다. 지난 2014년 방한했던 시진핑 주석은 임란때 양국 국민이 함께 싸운 역사를 상세히 언급해,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에게도 과거처럼 다시 중국에 밀착하라는 의도라는 해석을 낳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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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 70주년 기념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 촬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6.25를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르며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와 승리한 전쟁`이라고 선전해왔다/사진=바이두

6.25에 대해서는 더 노골적입니다. 중국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처음 진입한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 이라며 매년 기려왔습니다. 중국의 개입은 신흥국이 무패의 미국에게 처음 패배를 안겼다고 선전하고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 국가로 인정받는 기회가 됐습니다. 또한 대내적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자국민에게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어 결속을 도모하고 정치적 통제도 강화할 수 있었죠.

이달 17일 중국 국영방송 CCTV는 항미원조 승리 70주년을 맞아 6.25를 주제로 한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 촬영에 들어갔다고 밝혔습니다. 중국 언론들은 해당 드라마가 중국의 6.25 참전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줄 것이라고 소개했죠. 이 드라마 역시 중국 국민들의 내부 결집을 노린 의도로 분석됩니다. 중국 당국의 이 같은 선전선동은 미·중 대립이 극에 달한 최근 더 두드러지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두 전쟁은 중국에게 요긴한 정치적 도구로 쓰여왔습니다.


왜군 조총·북한군 탱크 등 신무기 위세떨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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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뒤에서 조총으로 일제사격을 가하는 일본 보병들/사진=일본 위키피디아

임란을 얘기할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조총입니다.


일본은 자국에 표류해온 포르투갈인들 로부터 현재 가치로 2억엔(한화 20억원)에 상당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조총 2자루를 입수 합니다. 그리고 2년 넘게 공들인 끝에 조총의 독자 생산에 성공했고 이후 조총은 일본 전국시대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이 됐죠. 조선 침략 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다이묘들은 최대한 많은 조총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전쟁 초기 전체 병력에서 조총부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10~20%정도에 불과했지만 전황을 결정한 핵심적 요인이었죠.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부산 상륙후 20일만에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밀고들어왔고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하고 맙니다.

당시 조선 조정이 조총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총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고 수차례 경고했지만, 신립 등 많은 중신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큰 댓가를 치르게 되죠. 전쟁 종료 후 선조가 조선인 포로들을 소환하기 위해 사신을 일본에 보내며 "백금을 넉넉히 보내 잘 만들어진 조총을 사오게 하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당시 조총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즉, 도요토미가 조선, 명에 이어 인도까지 복속해 천하정복을 이루겠다는 망상을 실현하려 한 배경에는 우연찮게 손에 넣게 된 조총이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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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3일 만에 서울에 나타난 북한군 105여단 소속 T-34 전차/사진=미국립문서보관소

360년 뒤,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 최정예 3, 4사단과 105전차여단의 공격에 국군 제 7사단 등 수도방위군은 속절없이 무너지며 국가 지도자의 도망은 재현 됐습니다. T-34는 2차대전때 이미 등장했던 만큼 신무기라고 하기 어렵지만, 당시 소련군 전차중 가장 최신식 이었고 북한은 이를 240여대나 보유하고 있었죠. 반면에 국군에게 전차는 단 한대도 없었고 T-34를 파괴할 만한 화기도 갖춰지지 않았었습니다.

북한군의 탱크를 잠재운건 미군이 투입한 신형 전차 M46였습니다. 1948년에 개발돼 6.25때 처음 실전 투입된 M46는 북한군 T-34에게 '저승사자' 같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단적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M46 전차부대는 북한군의 T-34 전차 8대를 아무런 피해없이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죠. 전쟁이 길어지면서 탱크 보다 제트 전투기 등 공중전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만, 북한의 전차는 남침 초기 한국을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대상이었습니다.


'원병삼백' 과 스탈린의 '휴먼지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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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하는 명군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 에는 `원병삼백(猿兵三百)` 깃발 아래 원숭이 부대가 그려져 있다

명이 조선에 보낸 병력에는 한족 이외에 몽골, 여진, 포르투갈 흑인 용병 등 다양한 배경의 병사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여러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자들이 참전한 만큼 임란은 중세시대 동북아 최대 국제전 이었죠. 종전 후 명나라 군사가 철수하는 장면을 담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라는 그림에는 조선에서 철군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猿兵三百(원병삼백)이라고 씌어있는 깃발 부분 입니다. 깃발 아래 털이 무성하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행군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죠. 원병(猿兵)은 글자 그대로 '원숭이 병사'를 뜻하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평양·행주대첩과 함께 임란의 3대 육전 중 하나인 소사전투에서 이들이 활약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임란을 가장 자세히 서술한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도 비슷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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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이바노프 박사(좌)는 스탈린(가운데)의 지시에 따라 반인반수 병사 개발에 착수했다. 2005년 모스크바 문서 보관소에서 구소련 일급 기밀 문서가 공개되며 그 전말이 밝혀졌다/사진=유튜브 캡처

원숭이를 전쟁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300년 뒤 소련에서도 발견 됩니다. 1920년대 군사력 보강을 위해 스탈린의 지시로 비밀리에 추진됐다고 하는 '휴먼지 프로젝트'가 그것이죠. 소련의 과학자 일리야 이바노프는 인간과 침팬지의 교배종을 통해 인간의 지능에 더 민첩하고 강한 근력을 가진 혼혈병사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와중에 엽기적인 계획이 폭로되며 실패로 끝났지만, 만에 하나 성공했었더라면 이들로 짜여진 특수부대가 6.25에 투입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지배층 무능이 부른 비극...日·中 탓하기 전 국력부터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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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광복회장의 광복절 경축사는 정치권에서 논란을 낳았다/사진=유튜브 캡처

임란과 6.25 전쟁은 모두 휴전과 분단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주인인 조선(한국)의 의지와 자주권은 배제 됐습니다. 명은 조선의 의지에 반해 일본과 강화협상을 진행했으며, 이뤄지진 않았지만 조선 8도중 남부 4도를 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놓고 교섭이 있었죠. 한국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채, 휴전 회담은 연합군과 중국 대표들에 의해 조인 됐습니다.

전쟁과 분단의 원인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강대국들간 정치적 이해관계, 일제의 뒤늦은 항복 등 갖가지 요인이 언급 되고 있지만, 결국 한마디로 국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력이 아닌 남의 힘을 빌려 이룬 외적의 격퇴는 더 심화된 존명 사대로 흘러 또 다른 화를 불렀고, 남의 힘으로 얻은 독립은 분단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국토가 일본에 유린당하고 400년 뒤 남북 분단이란 상처까지 남게 된 것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국력 신장의 기회를 날려버린 지배층의 지독한 무능을 탓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댓가는 모두 백성과 국민의 몫 이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를 상기해 볼 때, 일본을 무릎 꿇리고 중국의 오만함을 잠재울 지름길은 친일 청산구호도 친중 사대도 아닌 그에 걸맞는 국력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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