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임영웅이 보여준 한국 '트로트'...원조는 일본 '엔카' 일까

입력 2021/01/30 06:01
수정 2021/04/12 10:51
[한중일 톺아보기-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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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각종 가요 시상식을 휩쓴 트로트 가수 임영웅은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BTS와 함께 올해를 빛낸 가수 1위에 선정됐다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트로트의 인기는 매우 뜨거웠습니다. 어떤 방송이든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 하나 정도는 필수로 방영하는 듯했고, 이 같은 추세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죠. 과거 중장년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트로트가 2030은 물론, 어린이 가수까지 등장해 구성지게 불리곤 합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일본 '아사히신문' 등 해외 언론들도 한국은 "트로트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며 잇따라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도 높아진 인기를 뒷받침해 줍니다. 한국 갤럽이 지난 19~21일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요즘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에 대해 조사한 결과, 트로트 예능들이 수위권을 차지했습니다.


동 기관이 조사한 지난 한 해를 빛낸 가수 순위에서도 40대 이상은 임영웅을 1위로 꼽아, 트로트 가수가 30대 이하에서 1위인 BTS와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그런데 트로트 인기가 높아지면서 수십 년 해묵은 논란 또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바로 트로트의 기원에 대한 것입니다. 트로트가 일본의 엔카(演歌)와 상당 부분 유사해 오랫동안 비교돼 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사실 이 같은 논쟁이 한국에서만 있던 것도 아닙니다. 일본에서도 1980년대 이미 엔카의 '한국 기원설'이 크게 유행한 바 있고 지금도 궁금증을 제기하는 일본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음악인들 사이에서조차 일제시대 엔카가 한국으로 유입된 것이 트로트라는 주장, 트로트는 한국 고유의 음악으로 사실상 일본으로 역수출된 형태가 엔카라는 주장이 엇갈립니다. 이처럼 트로트와 엔카의 기원이 어떻게 되고, 어느쪽이 원조인가에 대한 의견은 양국 모두에서 여전히 분분합니다.


서양 리듬 접목한 트로트·엔카…명칭은 1960~1970년대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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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 시대 자유민권운동 탄압 풍자화 [사진=금성출판 동아시아사 교과서]

19세기 동아시아에 있어 근대화란 곧 서구 문물에 대한 대응과 수용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트로트와 일본의 엔카는 전통 민요에 '폭스트롯(fox-trot)'이라는 1920년대 서구에서 유행했던 2박자 댄스리듬을 접목한 것이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트로트의 명칭은 이 폭스트롯의 일본식 발음 '토롯토'가 장르명으로 굳어진 것이란 설이 지배적입니다. '트로트의 황제' 가수 나훈아는 과거 수차례 트로트라는 명칭에 일본 잔재가 묻어 있기 때문에 우리 전통가요를 지칭하는 '아리랑' 같은 말로 대체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엔카라는 명칭은 연설(演說)과 노래(歌)가 합쳐진 말로 메이지유신 이후 1870년대~1890년 자유민권 운동을 하던 이들의 정치적 운동가(歌)로 시작된 것이 효시라는 게 일본 내 주장입니다. 그러다 다이쇼시대(1912~1926년) 이후 정치적 주장 대신 서민들의 삶을 노래한 엔카(艶歌·염가)가 등장했는데,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혼용되다 엔카(演歌)로 정착됐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메이지 시대 운동가는 현대 엔카와는 전혀 다른 장르로, 일본 정부 주도로 옛 용어를 가져와 엔카의 전통을 더 유구한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란 반론도 있습니다. 사실, 트로트와 엔카라는 음악 장르명이 등장한 시점은 한일 양국 모두 1960년~1970년대입니다. 그 이전에는 '유행가' '가요곡' 등으로 불렸습니다. 그럼에도 트로트, 엔카라는 명칭은 1920년대까지 소급돼 당시 대중가요를 가리키는 데도 쓰이고 있습니다.


'엔카의 아버지' 코가 마사오와 한국과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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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의 아버지이자 선린상고 15회 졸업생 코가 마사오의 모습(좌). 한국 생활은 그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도쿄 시부야에 있는 코가 마사오 음악박물관 모습(우) [사진=코가 마사오 박물관 홈페이지]

엔카를 거론 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은 '엔카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곡가 코가 마사오(古賀政男)입니다. '코가 멜로디'라고 불리는 그가 만든 곡들은 곧 엔카만의 독특함 음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평생 5000여 곡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고 당대를 풍미한 여러 엔카 가수들이 그의 곡을 열창했습니다. 일본에서 '가요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소라 히바리도 그중 한 명입니다.

미소라는 일본에서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받는 등 '국민가수'로 대접받았고, 엔카는 물론 쇼와시대를 상징하는 가수로 일컬어집니다. 이런 그녀의 인기에 일등공신이 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소라를 비롯해 코가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일본 음악인들은 수없이 많았고, 그의 족적은 일본 가요계에 아직도 큰 존재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코가의 음악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0년대부터 1940년 전후 집중적으로 그의 곡 50여 편이 한국어로 번안돼 불렸고,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엔 이미자에게 곡을 주기도 했죠. 이 시기 한국은 트로트의 첫 번째 전성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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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대표적 여성 대중가수로 평가받던 이미자(좌)와 미소라 히바리(우). 88올림픽을 맞아 코가 마사오가 작곡한 `슬픈 술` 이란 노래를 두 사람이 동시에 부른적이 있다고 한다 [사진=매경DB/미소라 히바리 공식웹사이트]

그런 코가의 음악적 배경엔 한국에서 보냈던 청소년 시절이 크게 자리했던 것으로 회자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기 때문인지, 그의 곡에는 한국적 정취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그 스스로 "만약 어린 시절을 조선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이런 곡은 못 만들었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음악적 기반에 한국이 자리했음을 공언하곤 했습니다.

8세 때부터 12년간 한국에 살면서 서울 용산의 선린상고를 졸업하기도 했던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음악적 기억을 살려 만든 것이 바로 '코가 멜로디'였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경성의 큰형네 가게에서 조선인들이 흥얼거리는 민요를 매일 들었다. 그때 그 음악의 뛰어남을 깨달았고, 멜로디가 뛰어난 부분은 작곡에 큰 도움이 됐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그가 엔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1980년대 일본에서 엔카가 한국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돌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2012년에는 당시 일본엔카가요협회 회장이 국내 한 케이블TV와의 인터뷰에서 "코가 마사오는 한국인"이라는 발언을 한것으로 전해져 파장이 일기도 했습니다. 미소라의 경우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재일조선인 출신이라는 루머가 일본 현지에서 돈 바 있지만, 코가가 한국인이란 주장이 나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초기 트로트, 엔카와 매우 닮았지만 갈수록 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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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1950년까지 한일 양국에서 발표된 대중가요는 2박자 계열 리듬에 5음계를 주로 썼고, 각각 후일 트로트와 엔카로 불리는 장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픽=조보라]

한국과 일본 모두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이 시작된 건 음반의 전기식 녹음기술 개발과 음반회사의 제작 체제가 확립된 이후입니다. 트로트, 엔카가 성립된 시기는 트로트는 1930년대, 엔카는 1920~1930년대로 시기상 일본이 약간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가 빨랐고 한국을 식민지배하고 있었으니, 일본에 서양 가요가 먼저 수입돼 한국에 전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국은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대중 사회화가 진행 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음악의 전파는 거의 시간 차 없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초기 트로트는 엔카와 같은 2박자에 5음계였기 때문에 왜색, 식민잔재라는 시비가 자주 붙곤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형성·발전됐기에 엔카와 매우 닮을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죠.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광복 전후에도 트로트와 엔카 양식의 노래는 양국 대중가요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조성, 리듬적 차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5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왜색풍 가곡 배격 계몽 강연회'를 여는 등 왜색 지우기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1960년대 접어들어 트로트의 뿌리에 대한 소위 '뽕짝 논란'이 처음 등장하는데, 바로 당시 대히트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왜색 시비로 금지곡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또 다시 첨예한 공방이 수차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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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공연중인 장윤정(우)과 남진(좌) [사진=연합뉴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모든 음악들처럼 트로트도 그 양식적 특성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습니다. 록, 발라드, 디스코 등 시기별로 다른 장르의 요소들과 결합하면서 1980년대 후반 주현미, 이박사 등장 이후로는 소위 왜색이 들어간 트로트는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장윤정을 필두로 한 새로운 형태의 트로트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던 색채를 물씬 풍겼습니다. 이처럼 엔카와 구별되는 트로트만의 특징은 시간이 갈수록 더 뚜렷해지는 모습입니다. 이에 따라 트로트를 왜색 가요로 간주하는 풍조도 과거에 비하면 크게 덜해졌습니다.


"한국인 애환 함께한 가장 서민적 가요"…원조 논쟁보다 발전 모색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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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황제`라 불리는 나훈아는 지난해 추석 연휴 14년 만에 방송에 출연해 폭발적 호응을 이끌어냈고 덩달아 정치권까지 술렁였다 [사진=MBN캡처]

트로트는 일제강점기 형성된 한국 최초의 주류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서민적이며 100여 년이란 가장 긴 세월 한국인들의 애환과 함께해 온 대중가요라는 수식어도 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계, 분위기, 창법 등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 사실입니다. 이로 인한 왜색 논란과 친일 행적 가수들이 활동했던 사례 등은 트로트가 왜곡된 대중가요의 표본에 지나지 않기에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왜색을 제거하고 독자적 색채를 가미해 하나의 장르로 확립된 만큼 일본 엔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트로트에 대한 논문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트로트 박사' 손민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트로트는 전통으로서 가장 한국적 음악이라 할 수 있다"며 엔카 아류설을 일축합니다. 일본뿐 아니라 서양의 영향, 또 유행하는 음악들의 특징을 수용하며 계속 발전해 온 한국적 가창이 트로트라는 겁니다.

손 교수는 "음악이란 시대가 선택하는 것"이라며 근래 트로트의 유행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코로나19로 힘겨운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트로트의 인기는 과거 세상이 어려울때마다 트로트에 대한 관심도가 고조돼 왔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트로트는 "한국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이라고 손 교수는 강조합니다. 또한 "BTS를 필두로한 K팝 처럼 트로트의 한국스러움, 솔직함은 분명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습니다.

동아시아의 문맥에서 트로트와 엔카는 서양 음악을 전통과 절묘하게 조화시킨 대중음악입니다. "문화의 흐름에 일방적인 것은 없다"는 말처럼, 그 형성과정을 냉정히 보면 트로트와 엔카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분법적 우열 또는 원조 논쟁에 매몰되기보다, 어떻게 하면 트로트가 더 한국적 정취와 특성에 맞게 발전할 수 있을지 더 유익한 고민을 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음악의 역사는 대중의 마음의 역사라고 합니다. 트로트 열풍에 피로감과 식상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트로트는 또 변화할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 트로트는 계속 그 생명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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