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못살겠다" 중국화에 이민붐·공무원 줄사표...'천안문' 32주년 맞은 홍콩

입력 2021/05/29 06:01
수정 2021/06/13 11:07
[한중일 톺아보기-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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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6월4일 빅토리아 공원에서 천안문 사태 희생자를 기리는 촛불 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홍콩 최대 공원 빅토리아 파크에서는 6월 4일이면 성대한 행사가 열린다. 중국 '천안문 사태'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집회다. 홍콩 최대 민주파 단체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支聯會·지련회)의 주도로 연설과 노래 등 일련의 이벤트가 이어진다. 시민들은 평화롭게 촛불을 들고 희생된 넋들을 기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행사에 매년 십수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함께해왔다. 그런데 지난해 홍콩 당국은 코로나19를 빌미로 사상 처음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추도식에 모였지만 참여인원은 수천명으로 전년에 비하면 현저히 줄어들었다.

지난달 지련회의 리척얀(李卓人) 주석은 홍콩 국가안전수호법(홍콩보안법)을 앞세운 당국의 조치에 구속됐다.


집회를 지지하는 범민주진영 인사들은 대부분 수감된 상태다. 뉴욕타임즈(NYT)의 지적처럼 이제 홍콩에서 민주주의 활동가는 범죄자가 됐다. 32주년을 맞는 이 집회도 곧 맥이 끊길 상황이다.

집회 단골 장소였던 천안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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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광장의 상징은 머리 스타일이 인상적인 마오의 거대 초상화다. 이 초상화는 매년 새로 교체 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던 천안문 광장은 만리장성, 자금성과 함께 베이징의 3대 랜드마크다. 오늘날 베이징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르곤 하는 관광지다.

사실 천안문 광장은 1919년 5·4운동 이후 1980년대까지 시위와 집회가 열리던 단골 명소였다.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수십만 명의 홍위병들이 새까맣게 운집했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 인민들이 억울한 사연이나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곳에 사람이 모일 때면 항상 역사적 사건 발생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 이후 더 이상 시위나 집회가 일어나는 광경은 볼 수 없게 됐다. 항시 공안들이 배치돼 경계중인데다 양회 등의 큰 정치적 행사나 6월 4일이 다가오면 감시 경비 태세는 극도로 삼엄해진다.

그해 6월4일, 광장은 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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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당시 항쟁의 상징이 된 탱크를 막아서는 남성.[사진=연합뉴스]

1989년 4월 15일, 대학생들은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추도 성격으로 시작된 집회는 부패척결과 독재 타도라는 구호로 변하기 시작했다. 쌓여있던 불만과 열망이 일거에 터져나온 것이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을 빠르게 발전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 부정부패도 심해졌다. 한편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도 커졌다.

현재 중국을 보면 상상이 안 되지만 시위와 함께 민주화를 촉구하는 대자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내걸렸다. 후야오방 총서기는 이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강경진압을 원하던 세력에 축출됐고 급사했다.

시위대는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는 보수파 지도부의 퇴진과 부패관리 엄벌을 요구했다. 이에 보수파들은 진압을 통한 강제 해산을 주장했고, 후야오방의 후임 자오쯔양 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대화와 협상으로 방법을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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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당시 무력진압을 반대하다 실각한 전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 2005년 사망때까지 가택연금 당했다.[사진=유튜브 캡처]

개혁파와 보수파 중 승리한 건 보수파였다.


리펑 총리는 시위대를 반혁명 세력 음모에 가담한 폭도로 규정했다. 지도부는 결국 5월 19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2주간의 대치 이후 광장 주변을 에워싼 군대는 6월 4일 새벽을 기해 탱크로 진격했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당시 탱크가 이들을 깔아죽이기도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인 위구르족 출신 우얼카이시는 1991년 대만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사실임을 증언했다. 사상자에 대한 믿을 만한 공식 집계는 없지만 최근 기밀 해제된 영국 외교문서에는 중국 국무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최소 1만명이 희생됐다고 나와있다.

中서 최대 금기…정치심사서 검증도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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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희생자 유족들의 단체 `천안문 어머니회`에 대한 감시 등의 조치는 최근 더 강해지고 있다는 후문이다.[사진=연합뉴스]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는 금기중 금기다. 관련된 모든 것들이 금지된다. 중국 바이두 백과 등을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는 건 1976년 4·5운동일 뿐,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는 아니다. 같은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전자는 허용되고 후자는 안 되는 이유는 한쪽은 당에 의해 '정당한 항거'로 인식되고, 다른 한쪽은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항시 인터넷 검열이 일상화된 중국이지만, 특히 6월을 전후로 강도가 가중된다. 6·4라든가 1989.06.04 같은 3000여개가 넘는 단어들이 모두 걸러진다. 문학이나 영화 등 대중문화 소재로 쓸 수 없는 건 물론 학술연구조차 안 된다. 천안문 사태에 대한 외신의 취재는 교묘하게 차단된다.

직업 선택과도 관련이 있다. 당이 곧 국가인 중국에서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심사(政審)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해당 인물은 물론 그의 직계존비속에 대한 것까지 샅샅이 뒤져본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증명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천안문 사태 또는 이와 관련 어떤 활동에도 참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홍콩에 다시 부는 이민 붐…150만 '대탈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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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영국,대만 등으로의 이민자수는 최근 1~2년새 급증했다.[그래픽=조보라]

지난해 6월 코로나19로 시위가 잦아든 틈을 타 중국 당국은 홍콩보안법을 시행했다. 이 법은 홍콩인들에게 애국과 충성을 요구하며 위반할 경우 중국 국내 법정에 이송돼 재판을 받을 수 있다.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이 무늬만 바꾼 셈이다.


이처럼 중국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홍콩인들 사이 전례 없는 이민 붐이 나타나고 있다. 쪼그라든 자유와 권리에 대한 반발심과 절망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영국해외시민(British National Overseas·BNO)여권을 소지한 홍콩인들의 이민 비자 신청은 두 달 만에 3만4000건을 돌파했다. BNO여권 발행건수도 급증했는데 지난해 이미 30만건을 훌쩍 넘어선 바 있다.

또한 홍콩민의연구소가 지난 3월 홍콩인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22%가 이미 홍콩을 떠났거나 조만간 떠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홍콩 전체인구가 750만명임을 감안하면 150만명이 넘는 시민이 빠져나갈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부터 1997년 주권 반환 이전까지 홍콩에서는 이미 이민 붐이 불었던 적이 있다. 그들에게 천안문 사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안문 사태 이듬해인 1990년 한 해에만 6만명이 넘는 이들이 짐을 쌌다. 1994년까지 매해 비슷한 숫자가 홍콩을 탈출했고 홍콩 반환이 완료된 이후에야 잠잠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심각하다. 과거에는 외국 국적을 취득해도 홍콩 영주권이 인정됐지만, 이젠 불가능해졌다. 자국민의 이중국적을 금하는 중국의 '국적법'이 홍콩에서도 시행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민을 가는 홍콩인들은 영영 못 돌아올 것을 각오하고 고향을 등지는 셈이다.

공무원들도 줄사표…사직자 14년만에 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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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언론은 케리 람 홍콩 행정장관(좌)이 이주민들에 대해 "탈주범 정도로 별로 신경쓸 것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사진=연합뉴스]

홍콩에서도 공무원은 한국처럼 인기 직종이다. 이런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 홍콩 당국은 지난해 11월부터 공무원들에게 '홍콩 기본법, 안전법,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는 선서를 의무화하고 있다. 여기에 BNO여권 반납까지 강제해왔다.

이 때문인지 최근 1년간 홍콩에서 사직한 공무원은 1800여 명에 달해 14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홍콩 당국은 대부분 적성에 맞지 않아 수습기간 중 그만둔 것 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고위급 공무원의 사직률 역시 전년 대비 약 1.7 배에 달할 만큼 늘었다. 부문별로는 이직률이 과거 몇 배나 뛴 경우도 있다. 따라서 소위 '충성서약' 의무화 등에 따른 여파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는 공무원 지급금 규모 변화로도 추정된다. 홍콩의 공무원 지급금은 사전 통보 기간을 거치지 않고 즉시 이직이나 사직을 한 경우 정부가 회수하는 위약금이다. 지난 1년 새 이 위약금이 42%가량이나 늘어났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공무원들이 이직 통보 기간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떠났다는 의미다.

천안문 흔적 '완전삭제' 현재 진행형…홍콩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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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반정부 시위 당시 홍콩 이공대에서 시위학생들이 써놓고 간 글씨.[사진=트위터 캡처]

지난 27일 홍콩 선거제 개편안이 홍콩의회를 통과했다. 중국 전인대를 거쳐 결정된 개편안은 선거 출마 후보자 자격 심사 등이 골자로, 당국이 지명하는 기관이나 관계자들이 인당 최대 44표를 행사할 수도 있다고 알려졌다.

이로써 선거는 1인 1표라는 민주주의 원칙은커녕, 홍콩인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출을 위한 창구 역할도 상실하게 됐다. 지난해 총선이 1년 연기되고 민주파 의원 4명의 직위가 사법절차 없이 박탈됐을 때 이미 예상된 수순이기도 했다. 벼랑 끝에 선 홍콩 시민들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던 총선마저 희망을 걸 수 없게 됐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예상대로 홍콩 당국은 올해 천안문 사태 추모를 위한 6·4 집회 불허 방침을 확정했다.

인민해방군 손에 인민의 피를 묻혀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홍콩 송환법 사태 때 제2천안문이라는 우려가 나왔기 때문인지 중국은 아직도 천안문 사태 지우기에 골몰하는 듯하다. 아예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천안문 사태와 6·4라는 숫자를 영원히 삭제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중국화의 시계가 다 돌아가면 더 이상 예전처럼 자유로운 홍콩은 온데간데 없을 것이다. 홍콩을 떠난 한 시민은 지난 20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홍콩을 중국화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위험성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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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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