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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클로즈업] 가끔 시간 여행자가 된다

전지현 기자
입력 2020.08.0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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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종종 '시간여행자'가 된다. 타임머신은 필요 없고 TV만 있으면 충분하다. 추억의 드라마들이 그 시절로 이끈다.

최근에는 TV 채널을 100번까지 돌려보다가 막장 드라마의 여왕인 임성한 작가와 배우 장서희를 스타덤에 올린 '인어아가씨'를 봤다. 새색시 우희진이 한여름에 속치마까지 갖춰 색동 한복을 입고 시집살이를 하는 모습에 놀랐다. 2002~2003년 방송된 드라마인데 그 시절 여성들이 신혼 때 한복을 입었던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내 한복은 폐백 후 옷장에 들어가 나온 적이 거의 없다. 역시 임성한 작가의 '오버'는 대단하다. 3대가 모여 사는 집에서 장서희가 드라마를 집필하면서 삼시세끼를 준비하는 장면도 요즘 페미니스트의 공분을 살 만하다.

그래도 장서희의 리즈 시절과 4년 전 세상을 떠난 배우 김성민을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당시 방송 담당 기자로 두 배우를 인터뷰했던 아련한 기억도 소환됐다. 아역 배우로 데뷔한 지 20년 만인 31세에야 첫 주연을 꿰찬 장서희가 큰 눈을 부릅뜬 채 "독기를 품고 복수극을 펼쳤다"고 말한 게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골프 선수 길을 포기하고 연기를 선택한 김성민의 건장한 어깨도 선명하다.

요즘 방송되는 새 드라마들에 눈길이 안 가서 자꾸 'TV 박물관'인 주문형비디오(VOD)를 헤매게 된다. 외계인 김수현의 초능력에 반한 '별에서 온 그대'(2013~2014년), 성상납 강요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진 고(故) 장자연이 나오는 '꽃보다 남자'(2009년), 가수 비의 까칠한 매력에 빠지는 '풀하우스'(2004년) 등을 정주행하다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가끔씩 의외 발견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김사랑이 맞선을 보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백남준의 대형 비디오 아트 작품 '다다익선' TV 모니터 1003대가 풀가동되는 장관을 봤다.


백남준이 1988년 TV 모니터를 오층탑으로 쌓은 이 작품은 2008년 2월 누전으로 가동이 중단돼 지금까지 꺼져 있다.

미술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알게 된 작가들의 작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사과 작가 윤병락, 색띠 작가 하태임 등 인기 화가들의 작품이 드라마 장면에 종종 등장한다. 무전기 수준에서 스마트폰으로 변천한 휴대폰을 보는 것도 깨알 재미다.

일상생활에 무리를 주는 16부작 드라마 완주를 자제하고 TV 채널만 돌려도 옛 드라마가 홍수를 이룬다. 복고가 대세가 되면서 '서울의 달'(1994년)과 '전원일기'(1980~2002년) 등 1990년대 드라마까지 전파를 타고 있다. 물광 피부 시술이 없던 시절이라서 짙은 화장에도 배우의 얼굴 잡티가 두드러지만 스타의 풋풋한 과거를 만나서 즐겁다. 성형을 한 배우는 예전 모습이 노출되는 게 싫어 과거 드라마 방영 금지 소송을 검토했다고 하지만, 시청자들은 옛 추억에 젖어들 수 있어 행복하다. 역시 드라마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자 역사다.


그런데 왜 요즘 드라마를 외면하고 'TV 박물관'을 헤맬까. 콘텐츠 경쟁력이 급증한 채널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배우 연기와 연출력, 특수 효과는 발전했지만 작가의 역량은 퇴보하는 느낌이다.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지만 스토리가 약한 요즘 드라마는 16부작을 이끌어갈 동력을 자주 상실한다. 시청률 10%가 넘는 드라마가 거의 없는 걸 보니 나만 재미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문화스포츠부 = 전지현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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