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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배한철 역사의 더께/조선국]"대포 몇방이면 조선해군은 궤멸된다"

배한철 기자
입력 2020.09.16 16:21   수정 2020.09.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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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한양 도성 위의 아이들. 허버트 조지 폰팅, 19세기말, 20세기초.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0~1903>. 서울 도성 주변에 초가집이 무질서하게 난립해 있다. 19세기 조선은 모든 분야에서 아시아 꼴찌였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참담함 그자체였다. 유대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1832~1903)는 1890년 발간된 <금단의 나라: 조선으로의 항해>에서 "억압적 정치 체제가 지속되고 인접 국가들과의 교역마저 전면적으로 단절된 상황에서 조선의 산업이 무너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오페르트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를 훼손했던 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페르트는 또한 "조선의 면과 마 제품은 조잡하기 짝이 없으며 비단은 아예 만들지 못해 상류층만이 중국제를 구입해 입는다"고 기술했다. 목기와 철기 제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우수한 기호품과 사치품과 비교하면 매우 질이 떨어졌다. 다만, 사대부들이 주로 썼던 종이는 세 나라 중 품질이 제일 좋아 잘 찢어지지 않았다.


건축 수준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조차 건물들은 대부분 단층에 진흙으로 지어졌으며 지붕도 연토나 짚을 이어서 올렸다. 유리가 생산되지 않아 창은 기름종이를 발랐다. 세간이라 해봤자 식기 외에 별다른 게 없다. 오페르트는 "식기도 자기와 질그릇이 전부였고 쟁반은 사용하지 않았다. 의자와 책상, 그 외의 가구들은 오직 상류층만이 구비하고 있었지만 역시 장식용에 불과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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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포수들. 허버트 조지 폰팅, 19세기말, 20세기초.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0~1903>. 오페르트는 조선의 군사력이 제일 한심하다고 평가했다. 병인양요 때에는 군사가 없어 포수를 모집해 방어해야 할 정도였다. 제일 한심한 것은 군대였다. 상비군은 문서에만 존재했으며 병인양요 당시 무장한 병력이 전무해 1000명의 포수를 모집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거의 칼을 차고 있지 않으며 장교와 고위 지휘관들만 일본도를 차고 다녔다. 오페르트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남겨놓은 것들인 듯하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동아시아 최강 전력을 자랑했던 해군력 역시 한양 인근에 노후한 배를 몇 척 정박시켜 놓은 게 전부였다. 오페르트는 "몇 차례 정조준해서 포격하면 한 시간 안에 조선의 전 함대를 격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오페르트는 관리들의 구조화된 부정부패도 꼬집었다. 지방관은 임기가 매우 짧았다. 한 임지에 머무는 기간이 2년도 안 됐다. 정부는 매관매직으로 부족한 국고를 채웠다. 흥선대원군과 그의 충복들은 모든 관직과 서훈을 높은 값으로 매매했다. 지방관들은 관직을 사는 데 들어간 돈을 회수하기 위해 신속하게 납세금을 징수하고 뒷돈 챙기는 데 열중한다. 지역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아전들은 예외 없이 신임 상관들에게 이러한 뒷돈을 챙겨주며 자신들의 기득권과 영향력을 유지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헨드릭 하멜(1630~1692)은 <하멜표류기>에서 조선이 세계에 대한 인식이 지극히 낮다고 평가했다. 하멜에 의하면, 17세기 조선인들은 12개 왕국 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 이들 나라는 모두 중국 천자의 지배를 받으며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많은 나라가 있다며 이름을 말해 주어도 조선인들은 비웃으며 필시 고을이나 마을 이름일 거라고 반박했다.


하멜이 보기에 조선인들의 해외에 대한 지식은 태국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들보다 더 먼 곳에서 온 외국인과 교류해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다.

인구통계도 제대로 없었다. 오페르트는 "19세기 후기 조선 정부가 산출한 공식 인구는 750~800만 명이지만 이는 터무니 없는 수치"라고 말한다. 지방 관리들이 세금을 가로채기 위해 중앙정부에 가능한 실제 인구수를 감추어 신고해 실제보다 많이 축소됐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도서지역 추계도 빠졌다. "이를 모두 합치면 조선의 인구는 공식 통계보다 두배 가까이 많은 1500~16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오페르트는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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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함경남도 문천군의 관노비. 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멜은 조선의 인구 중 절반 이상이 노비라고 했다. 3000명이 넘는 노비를 소유한 양반도 있다고 했다. 노비는 전인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하멜은 "양반들은 토지와 노예를 통해 수입을 얻는다. 개중에 2000~3000명의 노예를 거느린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노예가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고 했다.


하멜이 목격한 조선의 형벌제도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국왕에게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사람은 밀린 세금을 다 낼 때까지, 또는 죽을 때까지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정강이뼈를 맞는다. 맞다가 죽으면 그의 일가친척이 밀린 세금을 내야 해 왕이 결코 자기 수입을 못받는 경우는 없었다. 하멜 일행의 물품을 훔친 도둑은 1m 길이의 팔뚝만 한 몽둥이로 발바닥 매질을 당했다. 각각 30~40대씩 맞았는 데 그중 일부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남편을 죽인 여인의 처벌은 무척 낯설다. 관아에서는 이 여인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어깨까지 파묻었다. "그 여자 옆에는 나무 톱을 놓아두었는 데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 번씩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잘라야 했다"고 하멜은 소개한다. 이는 하멜이 일본의 형벌과 일부 혼동한 듯 하다.

하멜은 사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불법을 닦고 전파하는 사찰이 양반들의 놀이터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하멜은 "양반들은 기생을 데리고 절에 자주 놀러갔다.


절은 매음굴이나 선술집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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