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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허연의 책과 지성] 오늘 아침 지하철역에서 만난 그 걸인이 신(神) 일지도 모른다

허연 기자
입력 2020.09.2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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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피에르 (1912~2007)

"타인을 지옥이라고 말한 사르트르가 지옥이다"
프랑스인이 가장 존경하는 레지스탕스 출신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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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복사를 설 때 꼭 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주일 아침마다 첫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찾아오는 나이 많은 노숙인이 있었다. 그분에게 성당에서 만들어 놓은 도시락을 드리는 일이었는데, 몸이 불편한 분이라 부축을 해서 성당 회의실에서 도시락을 드시게 했다. 식사가 끝나면 다시 문 밖까지 부축해야 했기에 나는 매번 그분이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분이 신(神)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동안 신이 노숙인의 모습으로 나를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지냈다. 우연히 교리공부방에 꽂혀 있던 아베 피에르 신부 소개 책자를 보면서 내 상상력은 더 힘을 받았던 것 같다. 피에르 신부는 자기 옆의 가장 초라한 사람이 곧 신이라고 생각한 사제였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 상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은 그런 모습으로 도처에 있는 것 아닐까.

피에르 신부는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자 "타인을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르트르가 지옥"이라는 말로 응수했던 인물이다.

국내에는 '단순함 기쁨'을 비롯 피에르 신부와 관련된 책들이 다수 나와 있다. 영화 '겨울 54'도 그의 빈민운동을 소재로 해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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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신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우선 이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앙리 그루에다. '아베 피에르'는 그가 히틀러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시절 쓰던 가명이었다.

피에르 신부는 1912년 프랑스 리옹의 유복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무렵부터 봉사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생테티엔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복을 처음 입는다. 6년의 수도 생활을 마치고 그르노블 성당에 재직하던 그는 유대인들을 숨겨주면서 현실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나치를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 주고 산길을 안내하던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된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그는 스페인을 거쳐 알제리로 가서 드골과 조우한다.


전쟁이 끝나고는 빈민운동에 헌신한다. 엠마우스 공동체를 만들어 노숙인을 위한 판잣집을 지은 피에르 신부에게 정부가 불법 건축물이라고 철거를 요구하자 그는 "아이들을 길에서 얼어죽게 하는 건 합법이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집을 짓는 건 불법이 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저항한다.

피에르 신부는 거리의 사제였다. 함께 구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기부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퀴즈 대회에 나가 1등을 해서 상금을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말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도 하지 말자. 조용히 그들의 고통과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그들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하자.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자."

오늘 지하철역에서 본 그 걸인이 바로 신일지도 모른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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