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원나라의 안녕을 위해 만든 우리 국보탑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1/07 13:42
수정 2021/01/0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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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기황후 초상화. 그러나 이는 원나라 3대 황제인 무종의 생모인 소헌원성황후 초상화(대만고궁박물관 소장)이다. 소헌원성황후는 남편(순종)이 실제 황제에 오르지 못했지만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황후로 존칭됐다. 기황후의 남편이자 원나라 마지막(11대) 황제였던 혜종에게 명나라때 `순제`라는 칭호가 덧붙여져 혼동을 초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원나라 기황후(생몰년 미상)는 고려 출신으로 공녀로 원나라에 보내졌다가 황후가 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흔적을 담고 있는 국보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박물관 전시동 1층 중앙에 전시된 높이 13.5m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 86호)을 말한다. 이 탑이 기황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황해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기슭에 있었던 경천사는 고려 전기 창건된 절이다. 고려 역대 왕과 왕후의 제사를 지내던 중요 사찰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118년 고려 제16대 예종이 아버지인 숙종 기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고 1134년 제17대 인종은 어머니인 문경태후의 추모제를 열었다. 18대 의종, 31대 공민왕 등도 이 절을 자주 찾았다.

경천사탑은 고려 말엽 원나라 간섭기에 조성됐다.


이 탑의 제1층 탑신석(석탑의 몸체를 이루는 돌)에 명문이 새겨져있다. 명문은 연대와 발원자, 조성배경을 기술하고 있다.

"(탑은) 대화엄 경천사에서 1348년(고려 29대 충목왕 4) 3월 세워졌고 발원자는 중대광 진녕부원군 강융, 원사 고용보, 대화주 성공, 법산인 육이이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조성하였다."

강융은 관노 출신이었지만 딸이 원나라 승상 탈탈(1314~1355)의 애첩이 돼 권세를 누렸다. 고용보는 고려 출신 환관으로 원나라 간후 그곳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했다. 그는 원나라 공녀였던 기황후를 순제(원나라 마지막 황제 혜종)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경천사지 석탑 건립의 주도적 인물들은 핵심 부원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안녕을 기원했던 황후는 바로 기황후이고, 황태자는 그녀 아들인 아유르시리다르(북원의 소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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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1907년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86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궁내청 대신이 약탈해가기 전인 1907년 개성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의 경천사지 10층 석탑 모습이다. 이 탑은 원나라 간섭기인 1348년 친원세력들이 원나라 황제와 기황후의 안녕을 기원하며 건립했다.

탑을 세운 목적부터 친원적이었고, 이에 따라 탑의 형태도 우리나라 석탑의 외형과 매우 다르다. <동국여지승람>은 "원에서 기술자들을 모집해와 탑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1층에서 3층까지의 기단부는 '아(亞)'자 형태로 사면이 돌출돼 있다. 이런 양식은 우리나라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다. 원대에 유행한 라마교 불탑의 기단부나 불상 대좌와 유사한 외래적 요소다. 재료도 우리가 쓰지 않는 대리석이다. 대신 4층부터 10층까지 탑신 부분은 우리 전통의 사각형 평면구조를 따르고 있다. 특히 지붕과 기둥, 처마, 난간 등 세밀한 표현은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모습을 반영한다.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뛰어나며 장식이 풍부하고 조각 수법이 탁월하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석탑의 백미는 석탑 전체에 정교하게 새겨진 불보살이다. 층별로는 기단부에 사자, 용, 연꽃, 서유기 장면 등 불법 수호자와 나한들이, 1층에서 4층까지는 부처의 법회 장면이, 5층에서 10층까지는 합장한 불좌상이 빼곡히 조각돼 있다.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불교적 위계가 높아지는 것이다.

경천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폐사됐지만 탑은 그대로 남았다. 하지만 근대사의 격랑 속에 빼어난 자태의 경천사탑도 시련을 겪는다. 1907년 2월 4일, 수백명의 괴한들이 경천사탑을 노리고 절터에 들이닥쳤다. 괴한들은 탑을 무단으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 탑을 지키기 위해 달려 나왔으나 괴한들은 총칼로 주민의 접근을 막았고, 달구지 10여 대에 탑을 나누어 싣고 서둘러 달아났다. 결국 이들은 철도를 이용해 일본 도쿄로 석탑을 빼냈다. 희대의 문화재 약탈사건의 범인은 일본 궁내청의 대신인 다나카 미쓰아키 자작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경천사탑을 탐냈다. 그러던 중 1907년 1월 20일 순종 결혼식에 일본 특사로 파견되자 탑을 빼내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탑 밀반출에 인부 200명과 수레 10여 대, 무기를 동원했으며, 반발하는 개성 주민에게 "고종 황제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하고 이마저 먹혀들지 않자 무력으로 주민들을 제압했던 것이다.

연일 이 사건이 우리 언론에 오르내렸고 외국 여론은 물론 일본인들 사이에서조차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며 파장이 확대됐다. 다나카는 이를 의식해 본인 저택 정원에 포장도 풀지 않은 채 탑을 내버려뒀다.


1916년 새 총독으로 부임한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하등의 수속도 거치지 않고 운반해 갔으므로 어떤 구실로도 사유물이 될 수 없다"고 압박하자 다나카는 1918년 11월 15일 마지 못해 탑을 되돌려 보낸다.

반복된 해체와 운반을 거치며 탑은 큰 상처를 입었다. 이로 인해 반환된 상태 그대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보관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60년 경복궁 야외에 세워졌지만 날림 조립이었다. 1995년, 대대적인 경복궁 복원계획이 진행되면서 10년에 걸친 복원 작업을 통해 현재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됐던 것이다.

경천사탑과 판박이인 탑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다. 종로구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이다. 조선 유일의 석탑이며 높이는 12m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높이만 조금 작을 뿐 두탑은 외형이 거의 흡사하고 재질도 동일하다.

경천사는 조선 초만 해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왕들이 수시로 찾는 절이었다.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는 1393년 신하들과 이곳에서 천추절(千秋節·중국 황태자 생일) 기념행사를 열었다. 1394년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의 추모제를 지냈으며 1397년 계비인 신덕왕후를 위한 법회도 열었다. 경천사가 고려 왕조의 사찰이기도 했지만 고려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이성계 등 조선 초기 왕들도 원찰로 이용했던 것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제7대 세조(재위 1455~1468)는 1465년 효령대군(1396~1486)에게 명해 도성 안에 원각사와 탑을 건설했다. 탑은 건국 초 조선왕실의 사찰이었던 경천사탑을 모방했다. 원각사와 원각사탑은 외국에서 구경 올 정도로 명물이었다. 그러나 원각사는 불과 30여 년 만에 폐사된다. 연산군(재위 1494~1506) 때 절을 허물어 기생들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을 설치한 데 이어 중종반정 이후 공신들이 절터에 집을 신축하면서 사찰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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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1946년의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946년 2월 미군 공병대가 분리돼 있던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기중기로 올려 쌓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모방해 지었다.

원각사탑은 경천사탑과 마찬가지로 탑을 받쳐주는 기단이 3단으로 돼 있고 '아'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용, 사자, 연꽃무늬 등 갖가지 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됐으며 4층부터 정사각형 평면을 이룬다. 목조건축을 본뜬 외관 역시 구석구석을 장식으로 꽉 채웠다.

원각사는 허물어졌지만 이곳 석탑 역시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탑은 오랜 기간 7층까지의 아랫부분과 상부 3개 층이 분리된 상태로 방치됐는데 광복 후인 1946년 2월 미군 공병대가 기중기를 사용해 하나로 합쳤다. 대리석 부재의 부식이 심해지자 2000년에는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경천사탑은 적국의 황제 일가 안녕을 위해, 적국의 기술자가 투입돼 건립했다. 그렇지만 탑신은 우리의 석탑 양식을 지켜 이질적요소들의 융합을 추구했다. 조선 왕실의 발원으로 세워진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경천사탑 형태와 도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에서 알수 있듯이 경천사 석탑은 한국의 석탑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각에서는 경천사탑을 평가절하하지만,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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