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경복궁 허물고 석굴암 옮기려 했던 일제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1/14 16:52
수정 2021/01/2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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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경주 남산의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1년 도쿄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가 조사하면서 찍은 것을 추정된다.

자칫 했으면 우리는 경복궁에서 동양 조각사의 금자탑이라는 석굴암을 만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한일병합 두달 전인 1910년 6월, 경주군청 서기로 부임한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는 관찰사의 난데없는 명령을 받고 자신의 귀를 위심해야만 했다. "불국사의 주조불(금동불)과 석굴암 전체를 경성으로 운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운반에 소요되는 경비를 산정해 올리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1924년 펴낸 <조선에서 늙어가며>에서 그는 "무척 무모한 짓이다. 그대로 따르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묵살하기로 했다"고 기술했다.

한일병합 전후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됐던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은 그렇게 시작됐다. 곧이어 석굴암의 실제로 관할하고 있는 장기군청에 구체적인 이전지령이 하달됐다. 장기군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표고 561m 산꼭대기에서 감포항까지 4리(16㎞)에 이르는 도로를 어떻게 낸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재주로 귀중한 38체의 석상과 수많은 석굴부재를 산길을 통해 완벽하게 운반한다는 것인가. 장기군은 견적조차 내지 못한 채 쩔쩔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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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의 현재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는 집요했다.


1912년 7월 당시 조선 유일의 박물관인 이왕직박물관의 스에마쓰 구마히코 사무관이 월간지 <조선과 만주>에 다음과 같은 기고문을 실으면서 논란에 불을 지핀다. "(석굴암을) 벽지 산중에 풍상우설의 박해에 노출되는 대로 방치하는 것은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중략)… 많은 국비를 투입하여 이것을 경복궁 내 등에 이전하든지…"

이제는 구체적인 이전 장소까지 언급되기 시작했다. 박물관 실무자의 개인적 견해를 표방했지만 이는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의 의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 그는 초대 조선 총독을 지냈으며 강력한 무단 식민정책으로 우리에게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아라키 준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원이 <문화재> 최근호에 발표한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 반출 경위에 대한 고찰'에 의하면, 데라우치는 조선과 일본 민족의 조상이 하나라는 '일선동조론'을 추종자였다. 식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인 '일선동조론'을 바탕으로 본인들이 정복한 유교 중심의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동시에 조선이 일본과 뿌리를 같이 했던 고대로 회귀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한 구상의 일환이 석굴암 경성이전이었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고대 조선 민족의 최고 미술작품인 석굴암을 안치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선언하려는 야망이 배경에 있었다.

그러한 속셈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경복궁에서 펼쳐진 조선물산공진회로 구체화됐다. 병합 후의 조선의 진보를 과시하고 일선동화를 촉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전국의 물품을 수집해 전시했다. 데라우치는 석굴암을 가져다가 이 공진회의 전면을 장식하려 했던 것이다.

놀라운 소식을 접한 경주주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1912년 10월 30일자 매일신보는 "경주에 있는 신라 고도의 다보탑과 석굴암의 불적 등을 총독부에서 경성으로 이관한다는 유설이 전해져 경주지방의 조선인 등은 크게 떠들고 있다고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결국 석굴암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경성으로 갖고 오는데 대한 기술적, 재정적 어려움에다 경주주민들의 반대여론까지 겹쳐 데라우치의 구상은 무산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석굴암은 현지에서 수리·보존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고 1913년 11월부터 1915년 8월까지 해체수리가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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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식민 제국주의를 과시하기 위해 열렸던 조선물산공진회 광고.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석굴암 반출이 어렵게 되자 데라우치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다. 공진회 미술관 중앙홀을 석굴암처럼 꾸미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면서 석굴암 본존불 대신에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안치했던 것이다.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도쿄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1년 경주를 샅샅히 훑어 찾아냈다. 데라우치는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말 만들어진 아름다운 불상이면서 석불 중 가장 원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불상은 무엇보다 외형적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하기도 했다.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이렇게 해서 남산을 떠나 경성으로 올라오게 됐고 공진회 중앙홀에 설치됐다.


약사여래좌상 옆에 협시불로 감산사지에서 옮겨온 미륵입상(국보 제81호)과 아미타상(국보 제82호)이 전시됐다. 한쌍의 불상 역시 미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중요했지만 입상이어서 약사애래좌상을 보좌하는 보좌불로 배치했던 것이다.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전체 높이가 340㎝에 이르며 800년 전후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남산 삼릉곡 정상 가까이에 있는 마애대불 건너편에 위치했다. 손상된 부분이 거의 없고 불상과 광배, 대좌를 온전히 갖췄다. 명칭의 여래는 석가모니불의 별칭으로 진리의 실현자를 뜻한다. 손모양 즉 수인(手印)도 석가모니불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데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 버린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왼손에 구슬(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불로 분류된다. 항마촉지인의 약사여래입상은 8세기 후반부터 크게 성행한 것으로 이러한 형태의 약사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서만 존재하는 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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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인산인해를 이룬 조선물산공진회 모습. 1915년. 사진 부산근대역사관 소장.

전체적으로 불상의 몸체와 광배, 대좌의 크기 비례가 적절해 안정감이 높다. 이 불상은 아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지 않았다. 불상은 풍만한 얼굴에 근엄하게 명상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다. 건장한 신체, 얌전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계단식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 최절정기 양식을 나타낸다. 특히 광배와 대좌에는 여러 문양을 매우 정교하게 조각해 넣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광배의 안쪽에 화불과 꽃무늬를 배치했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좌는 하대석에 쌍잎 연꽃무늬를, 상대석에는 겹잎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8각의 중대석 앞면과 뒷면에는 안상(眼象) 안에 향로를 새겼고 공양하는 천인상을 배치했다. 8세기 후반에 이뤄진 장식화 경향을 반영한다.

애초 삼릉곡 불상과 함께 경복궁 이전 후보로 검토된 불상이 있다. 이거사지(경주시 도지동)에서 수습된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역시 완전한 형태의 석불이다. 청와대 경내에 안치돼 있어 '청와대 불상'으로 유명한 불상이다. 방형대좌 석불은 데라우치가 개인적으로 탐을 냈다. 1939년 총독부 기사 오가와 게기치가 쓴 보고서는 "1912년경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하였을 때 이 불상을 보고 또 몇번을 돌아보고 열심히 본일이 있었다. 당시 경주 금융조합 고다이라 씨는 총독이 마음에 든 명불이라고 생각하여 바로 이것을 경성 관저에 운반한 것이라고 한다"고 기술한다. 불상은 1913년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가 데라우치에게 바쳐 서울 남산의 총독관저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후 1939년 경복궁에 새로운 총독관저(현 청와대)가 지어지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됐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해 관리해 오다가 2018년 보물 제1977호로 승격됐다.

결과적으로는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과 감산사지 입상을 앞세운 조선물산공진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이를 통해 경주 남산이 불교유적의 보고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됐고 또한 이를 통해 본격적인 남산 불적조사의 발판이 마련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할 것이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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