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조선 최고의 벼슬 평안감사 판공비는 65억원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1/28 15:07
수정 2021/01/2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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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20세기초 부벽루 일원 평양성.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평안감사향연도>는 평양성과 대동강 일원에서 펼쳐진 장대한 규모의 평안감사부임 환영 연회광경을 담았다.

스케일과 디테일에서 이에 견줄 작품을 찾기는 힘들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평안감사향연도> 말이다. 출연인물만 2500명이 넘는 스펙터클한 그림이다. 어둠이 깃드는 대동강에서 펼쳐지는 수상 퍼레이드는 한편의 블록버스터를 보는듯 화려하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면서 세부묘사도 대충 하지 않았다. 활기 가득한 관아와 거리의 풍경이 매우 섬세하며 등장 인물들의 표정·행동도 제각각이고 익살스럽다.

그림은 평안감사 부임을 환영하는 연회광경을 장대한 파노라마식으로 연출한다. 연회에 참여하고 또한 이를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그리고 성곽과 건물, 민가와 시전, 거리 등이 역동적으로 나타낸다. 활력과 풍요가 넘치는 당시 평양은 조선이 가난하고 낙후했다는 우리의 인식을 여지없이 허물어 버린다.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정작 본인이 싫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평안감사가 최고로 선망받는 관직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감사(監司)는 관찰사이다. 도백으로도 불렸던 종2품의 관찰사는 8도에 파견됐던 지방행정 최고 책임자로 관내 군사, 사법, 행정을 총괄했다. 그 중 평안관찰사가 으뜸이었다. 평안도는 세금으로 거둔 세곡을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지 않고 평안도 내에서 자체 사용했다. 군수물자 비축의 필요성, 낮은 미곡생산량, 운송의 어려움, 중국 사신 접대비 부담 등으로 인해 평안도의 세곡은 서울로 갖고 오는 것보다는 지방에서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평안감사는 다른 도와 달리 도의 세금을 걷고 사용하는 독자적 재정권이 부여돼 많은 관료들이 동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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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월야선유도(부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려하고 웅장한 대동강 연회장면을 묘사한다.

평양은 경제적으로 번성했다. 18세기 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은 경제가 활기를 띈다. 무엇보다 의주대로와 해로를 통한 중국 교역로의 길목에 위치한 평양은 이 시기 상업발전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인구와 물자가 평양으로 몰리면서 평양은 지방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부상한다.

평안감사가 되면 '돈방석'에 올라 앉았다. 평안감사의 판공비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유수원(1694~1755)의 '우서(迂書)'는 "평안감사가 한달에 쓰는 공비가 1000관(貫)이 넘는다"고 기술한다. 이는 상평통보 기준으로 1만냥에 해당하며 1년은 12만냥이 된다. 12만냥은 19세기 초반 상납미 3만석을 구입할 수 있는 액수로, 3만석을 오늘날 화폐가치로 단순 환산하면 65억원에 달한다. 19세기 초반 쌀값이 훨씬 비쌌던 점을 고려할 때 평안감사의 수입은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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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월야선유도(전체)`

권력과 재화가 있는 곳에 술과 유흥이 있기 마련. 기생도 평양이 제일이었다. '이춘풍전'에서 주인공은 평양의 기생에게 재산을 모두 탕진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호서의 사대부, 호남의 아전과 함께 관서(평양)의 기생을 '나라의 3가지 폐단'으로 지목했다. 접대로 평양을 따라올 곳이 없었다. 조선후기 문신 정태화(1602~1673)가 사행단을 이끌고 중국을 다녀온 내용을 기록한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은 평양의 환대문화를 언급한다. 이에 의하면, 정태화는 영의정에 재직 중이던 1662년(현종 3)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중국길에 올랐다. 정태화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평안감사 임의백(1605~1667)이 마중을 나왔다. 정태화가 평안감사의 안내를 받아 대동강에 이르자 기생들을 가득 실은 배가 띄워져 있었다. 정태화가 놀라 "상복을 입고 있는 처지이니 잔치는 불가하다"고 만류했다. 평안감사는 마지못해 별당에 숙소를 마련하고 대접을 했다. 이 역시 얼마나 융숭했던지 사행단의 역관들이 "이런 일은 과거에 없던 일"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연광정, 부벽루, 을밀대, 만경대, 모란봉, 능라도, 청류벽, 주암 등 곳곳에 산재한 자연·역사 명소들도 평양의 매력을 더했다. 평양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역사도시이자 다채로운 향연과 유흥이 끊이지 않는 풍류도시였다.

이같은 조선후기 평양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평안감사향연도>인 것이다. 길이 2m(가로 196.9cm, 세로 71.2cm)의 대작으로, 김홍도 서명과 인장이 찍혀있어 흔히 <전(傳) 김홍도 필 평양감사향연도>로 불린다. '연광정연회도', '부벽루연회도', '월야선유도' 등 총 3폭의 연작으로, 평양감영과 대동강변을 배경으로 펼쳐진 공식 연회의 전모를 조감한다. 3폭 그림에는 다양하고 생생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연광정연회도 434명, 부벽루연회도 701명, 월야선유도 1374명 등 도합 2509명이다. 성곽과 누각, 민가, 시전, 길은 물론 대동강, 땅의 형세, 산수 등 평양의 모습도 사실적이며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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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연광정연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성 연광정의 연회모습을 표현했다.

'연광정연회도'는 관서팔경인 연광정에서의 연회를 연출한다. 누각에 청색 융복을 입은 감사가 정좌했고 한껏 멋을 부린 기생들이 악공들의 연주 속에 춤을 춘다. 문 밖에는 아전과 사령, 백마와 가마를 들던 구종들이 대기 중이다. 누각 아래에서는 갓을 쓴 양반들이 연회 광경을 구경한다. 태를 들고 구경꾼을 제지하는 아전에 겁을 먹고 피하는 양반들의 표정에서 조선후기 풍속화의 재치와 해학이 녹아있다. 오른쪽 대동문 쪽에는 민가가 줄지어 있고 좌우 도로에 각종 물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가게마다 담뱃잎을 써는 장사꾼, 그 옆에 어린애를 업고 있는 아낙과 개, 소를 끌고 가는 남자, 술동이를 인 여인들, 물지게를 진 남자들, 엿파는 아이 등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을 다룬다. 기와집, 백성들이 입은 비단, 다양한 색깔의 옷 등에서 평양백성들의 부유한 삶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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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부벽루연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성 부벽루의 연회모습을 그렸다.

'부벽루연회도'는 모란봉 기슭의 부벽루에서 펼쳐진 연회도이다. 역시 관민이 함께하는 잔치가 무르익는다. 부벽루 좌측 모란봉 쪽에 많은 인물들이 운집해 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높은 곳까지 올라간 사람들, 손주를 업은 할머니, 술판을 벌인 사람들,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 등이 보인다. 건너편 능라도에서는 떠들썩한 연회와 상관없이 밭가는 농부들의 한가로운 생활을 보여준다.

'월야선유도'는 밤중에 진행된 대동강의 장엄한 행차장면을 담았다. 감사가 탄 정자선과 정자선을 호위하고 따르는 관선, 그리고 이를 구경하는 배 등 수십척의 배가 대동강을 꽉 매우고 있다. 성벽 위와 반대편 대동강가에는 횃불을 든 환영인파가 일렬 횡대로 질서정연하게 서 있다. 대동강변과 능라도에는 가족단위의 구경꾼들이 나와 이 모습을 지켜본다.

그림의 제작배경이나 내용에 대해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8폭 병풍으로 제작됐을 가능성은 낮다. 일반 병풍 보다 훨씬 커 애초 3폭으로 제작됐을 것이다. '부벽루연회도' 화면 상단에 '단원사(檀園寫)'의 수결(서명)과 '홍도(弘道)'의 백문방인(인장)이 있다. 화풍도 인물들의 풍부한 구성, 돋보이는 회화성 등 김홍도의 수법을 따른다. 하지만 인장은 김홍도의 종전 낙관과 다르며, 그림양식도 김홍도 다른 작품과 다소 차이가 난다. 여러 명의 화가가 김홍도의 수법을 추구하되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공동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림 속 여러 단서를 종합해 볼 때 궁중기록화로 평가된다. 연광정, 부벽루, 정자산의 기둥에 교서(행정 명령문서)와 유서(군사 명령문서), 절(관찰사 의장용 깃발)과 월(의장용 도끼)이 걸리거나 세워져 있고 감사는 밀부(비상시 군대를 동원하는 표식)를 보관한 노란주머니를 차고 있다. 사령들은 왕이 감사에게 하사한 일산(의장 양산), 백마, 가마, 표피 등을 들고 있다. 관찰사의 권위를 드러내고 왕권의 존재를 보여주는 상징물들이다.

금은 등 광물성, 식물성 안료의 사용과 채색 기법, 화면의 포치(布置·구도)나 시점, 인물을 그리는 묘법과 필치 등은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화원화(궁중회화)의 경향이다. <평안감사향연도>에 사용된 모든 채색은 화려한 색조의 광물·식물성 안료이다. 이 시기 궁중진채(眞彩)의 특성을 보여준다. 정자와 누각, 단청, 평안감사 융복, 깃발 등에 사용된 파란색의 석청(石淸)은 비싼 천연 안료로, 석록(石綠)과 함께 궁중회화의 청록산수화에 주로 사용됐다. 그림의 장식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금·은을 쓰고 있는데, 이도 왕실 기록화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이다.

조선후기 궁중화의 얼굴표현은 붉은 선 또는 갈색으로 얼굴을 윤곽한 후 이목구비를 선과 점묘로 표시한다. <평안감사향연도>도 이를 따른다. 엄정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는 행사에 많은 구경꾼을 동원해 극적인 왁자지껄한 현장분위기를 연출하는 감각도 정조 연간 궁중회화의 특징이다. 결론적으로 <평안감사향연도>는 왕에게 평안감사 부임에 대해 이해를 돕거나 보고하기 위한 어람용으로 그렸거나 부임식의 시각적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궁궐의 화원들이 제작한 그림이 분명하다.

조선후기 문인 신광수(1712~1775)는 절친인 채제공(1720~1799)이 평안감사로 부임하자 선정을 바라며 전별 선물로 108수의 시를 담은 '관서악부'를 지어줬다. 사망 1년 전인 1774년의 일이다. <평안감사향연도>에 이 '관서악부'의 내용이 응축돼 있다. 그림은 어진정치를 폈던 채제공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히 제작된 기념화일 수도 있다. 양반, 상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화합해 새로 부임하는 평안감사 채재공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을 통해 목민관으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간절함을 담았던 것은 아닐까.

이왕가박물관은 1916년 7월15일 김윤근에게서 3폭 모두 합쳐 단돈 80원에 샀다. 1916년 쌀 1석(144㎏) 값은 15원이었다. 단순 쌀값 비교로 80원은 오늘날 200만원에 해당하는 셈이다. 국보도 보물도 아니어서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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