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우연히 우리 품에 온 서역문명의 보고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2/05 13:42
수정 2021/02/0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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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베제클리크 제15석굴 서원화 벽화 중 일부. 10~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 도쿄의 미국 맥아더사령부는 느닷없이 우리에게 "서울에 있는 서역벽화가 안전한 상태인가"라고 물어왔다. 그들은 벽화의 안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재이니 잘 보관해야 한다"고 충고까지 했다. 서역벽화란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석굴사원의 벽화유물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미국이 각별하게 챙겼던 벽화들은 그러나 한국전쟁 초기 피난을 가지 못한 채 국립박물관 진열관 2층 창고에 머물러 있었다. 파손의 우려가 커 운반하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도 벽화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를 앞둔 1951년 4월, 당시 김재원 박물관장이 위험을 무릎쓰고 부산으로 옮겼다.


김 관장은 그의 저서 '경복궁 비화'에서 "(2차대전 때) 베를린의 서역벽화 책임자가 벽화 파괴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생명을 끊은 일을 안다. 1.4후퇴 이후 3개월 간 부산에서 걱정이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며 "직원을 서울로 보내 4주 동안 포장을 끝냈다"고 회고했다.

이역만리 서역의 벽화가 무슨 연유로 우리 박물관에 보관돼 있었던 것일까. 서역은 잘 알다시피 파미르고원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지역, 즉 중국령 중앙아시아를 이른다. 4세기 이후 수세기에 걸쳐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했던 실크로드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이 시기 석굴사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불교시설이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에 대거 건설된다. 실크로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재력가들은 무역이 더욱 번성하고 내세에도 안녕하기를 기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불사를 벌였던 것이다. 벽화들은 이들 석굴사원에 그려져 있다.

석굴사원은 오아시스가 가까운 한적한 임수협곡에 군집돼 조영됐다. 석굴사원은 사막지대의 혹서와 혹한을 피할 수 있으며 평지 사찰에 비해 내구성이 뛰어난 이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소음이 없어 불자들의 수행공간으로 최적의 공간으로 인식됐다. 이러한 서역의 석굴사원 문화는 동쪽 끝 신라까지 전파돼 한국미술사의 독보적 걸작인 석굴암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불교사원은 15세기에 접어들어 이슬람의 파도에 휩쓸리면서 생명이 완전히 끊기게 되고, 이어서 20세기 초 중국의 격변기 속에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희생물로 전락해 유물 대부분을 약탈당하는 대수난을 겪게 된다.


일본도 이 약탈전에 뛰어들었다. 교토의 니시혼간(西本願)사 문주(주지)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는 탐험대를 조직해 1902~1903년, 1908~1909년, 1910~1914년까지 총 세 차례 실크로드 벽화와 불상 등을 반출했다. 2차 탐험대 일원이던 노무라 에이자부로는 "수집품이 나무상자 45개에 담겼고 이 중 5상자는 벽화"라고 일기에 썼다. 벽화는 도쿄와 뤼순, 경성으로 반출돼 분장됐다.

이후 오타니는 사찰 내 배임 횡령, 문서위조 사건이 불거지면서 문주를 그만두게 되고 경성에 남았던 일부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된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광복을 맞으면서 유물도 국내에 그대로 남게 됐던 것이다. 서역벽화는 오타니가 수집한 것이라고 해서 흔히 '오타니 컬렉션'으로 지칭돼 왔다. 벽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장고 등에 보관 중이다.

박물관측이 이들 유물을 집대성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앙아시아 종교회화'에 따르면, 실크로드 회화는 72건, 77점이다. 이 가운데 벽화가 60건, 62점이며, 종이나 직물에 그린 그림이 12건, 15점이다. 현재까지 주제와 출처가 확인된 유물은 31건, 38점이다. 마니교 회화로 추정되는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교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타니가 불교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만큼 독일, 러시아, 영국 등 실크로드에 관심이 높았던 서구 국가에 비해 훨씬 수준 높은 유물을 수집한 것으로 평가된다. 서구의 탐험대는 벽면 전체를 뜯어냈지만 오타니는 석굴내부의 다양한 불화 중 중요한 주제를 선정해 절취했다.

벽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베제클리크 석굴에서 가져온 유물이 26점으로 가장 많고 야르호 석굴 5점, 쿰트라 석굴 4점, 키질 석굴 2점, 미란사원 1점 등의 순이다.


투루판(吐魯蕃)시 동북 40여 ㎞에 위치한 베제클리크 석굴은 위구르 왕실의 종교적 성지로, 80개 이상의 석굴이 조성됐고 현재는 58개가 남아 있다. 베제클리크는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을 뜻한다.

5세기부터 시작해 위구르 지배기인 10~12세기 매우 정교한 벽화가 제작됐지만 13세기 몽골에 멸망한 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벽화와 불교회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숱한 불경사본이 발견된 '불교문화의 보고'이다.

전성기를 대표하는 벽화 유형은 '바라는 바를 이루겠다고 맹세한다'는 뜻의 서원화(誓願畵)로, 석가모니가 전생의 삶에서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당시의 부처(과거불)을 공양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으로 태어났을 때의 그림이 유난히 많고 따라서 공양자가 왕실사람들로 묘사되고 있어 주요 발원세력이 왕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으로 서원화는 공양도(供養圖), 본생도(本生圖·석가모니 전생이야기인 본생담을 소재로 한 회화) 등의 별칭이 있다.

서원화 중에서 갑옷 차림의 2명이 공양물(빵)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그림과 꽃을 들고 있는 보살형 인물 벽화가 비교적 온전하며 수작으로 평가된다.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보살'을 그린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석가모니의 전생을 보살로 이해해서였다. 또한 무릎을 꿇고 앉아 슬퍼하는 승려, 옷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승려, 근육이 과장되게 표현돼 있는 악귀 등 사실적 인물묘사 돋보이는 벽화들도 베제클리크 목록에 포함돼 있다.

269개의 석굴이 군을 형성하고 있는 쿠차지역의 키질 석굴 벽화는 3~9세기 동안 여러 왕대에 걸쳐 조성됐다. 키질벽화는 부처가 나가왕으로 태어났을 때 공덕을 쌓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그림이 대표적이다. 인도, 이란의 영향을 받아 다른 곳과 달리 동그란 얼굴 형태를 띠고 푸른색의 안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110개 석굴이 현존하는 쿠차 쿰트라 석굴의 유물로는 한족 계통으로 8~9세기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천불도(千佛圖)가 있다. 천불도는 불법이 우주에 널리 퍼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뤄창현에서 북동쪽으로 50㎞ 떨어진 미란사원 벽화는 뚜렷한 이목구비, 큰 눈 표현과 날개를 지닌 천사 형상 등 서양 고전양식의 영향을 받은 게 특징이다.

이들 벽화와는 별도로 투르판 토유크 석굴과 둔황 석굴의 번(幡·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담은 예불용 깃발)도 컬렉션에 들어있다. 주로 직물과 종이에 그려졌다. 대체로 9~10세기 작품들이다. 관음보살 번의 소재는 면이며 크기와 구성이 베를린 아시아미술관에 있는 것과 흡사하다. 종이 그림으로는 여행하는 승려가 있고 견 위에 먹으로 보살을 그린 번도 다수 있다.

중앙아시아 종교회화는 분명 약탈문화재이지만 우리의 경우 선의취득에 해당한다. 물론 해당 지역에서 반환을 요구한다면 거절하기는 쉽지않겠지만 지금까지 돌려달라는 요청도 없었다.

예기치 않게 우리의 품으로 찾아든 이역의 벽화. 편린에 불과하지만 1600년 전 사막 한가운데서 꽃피운 문명의 수준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낯선 유물들이 실크로드와 고대 한반도 문화의 연결고리를 찾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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