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사라진 궁궐의 자취, 현판은 알고 있다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2/09 13:45
수정 2021/02/0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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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 전경.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96년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웠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1752~1800·재위 1776~1800)는 즉위 열흘 뒤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러면서 아버지 사당이던 수은묘를 크게 확대하고 이름도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의 경모궁(景慕宮)으로 바꿨다. 정조는 경모궁에 관한 기록과 의식을 정리한 경모궁의궤에 "피눈물 흘리며 글을 짓고 새긴다"고 적었다.

경모궁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뒷편에 있었다. 정조는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창경궁 동문을 통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 두차례 이곳을 참배했다. 25년간 재위하는 동안 정조가 경모궁을 다녀간 것은 무려 336회나 된다. 부친을 매월(月) 알현(覲)하러 가는 길이라고 해서 동문의 명칭도 월근문(月覲門)으로 붙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4년 경모궁 일원에 경성제국대 의학부가 들어서면서 본모습을 잃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남은 건물마저 모두 불타 버렸다. 현재는 정조가 친히 쓴 경모궁 현판만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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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영은문 현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써준 것이다. 현전하는 궁중현판 중 가장 오래됐다.

궁중현판은 전각, 궁문, 누각 등 각종 궁궐 건축물에 달았던 액자다. 건물명을 적은 액자를 모두 현판(懸板)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현판의 종류에는 현판, 편액(扁額), 주련(柱聯) 등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현판은 널판지나 종이·비단에 시문, 유명한 글귀, 수교(受敎·임금의 교명), 수칙(守則) 등의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건물에 거는 액자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이 가운데 특별히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건 건물의 이름을 적은 것을 편액이라고 일컫는다. 건물명 글씨는 통칭해서 현판으로 불러도 되지만 보다 정확한 호칭은 편액인 것이다. 주련은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를 말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궁궐현판은 경모궁 현판을 포함해 총 775개이다. 박물관측이 최근 수년간 '궁중현판 학술조사연구'를 통해 자체 소장한 현판의 전모를 살펴본 결과다. 이들 현판이 달렸던 궁궐건축물 대부분이 지금 남아있지 않아 건물의 자취와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무엇보다 현판은 해당 건축물이 최초 건립 또는 재건될 당시 제작됐던 것들이어서 더욱 가치가 높다. 도대체 이들 현판은 어떤 경로를 거쳐 한데 모이게 됐을까. 현판의 구체적인 현황과 각각의 글씨에 담긴 의미도 궁금하다.


연구에 의하면, 궁중현판 775개는 애초 창덕궁 행각에 놓여져 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2년 한 차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이관됐고 2005년 다시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왜 처음에 현판이 창덕궁 행각에 방치됐던 것일까. 조선시대 화재 등으로 건물이 없어지더라도 건물의 얼굴인 현판은 폐기하지 않고 꼭 보관했다. 그렇지만 따로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보니 비를 피할 수 있는 창덕궁 행각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받침대 위에 그냥 현판들을 올려뒀고 일반인들도 아무나 쉽게 볼 수 있었다.

1928년 도시확장으로 헐렸다가 1992년 복원된 혜화문(惠化門) 현판도 목록에 포함돼 있다.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연결되는 출입구로 이 문을 통해 주로 여진(女眞)의 사신이 드나들었다. 혜화문 현판 글씨는 복원때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엉터리로 썼던 것을 2019년 애초의 현판 글씨를 참고해 다시 만들어 달았다.

경희궁 편액도 발견된다. 경희궁은 1829년(순조 29) 불타 1831년에 중건됐으며 그나마도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해체됐다. 따라서 화재 이전 건물과 유물이 거의 전하지 않고 있어 현판의 희귀성이 높다. 어필이라는 글자가 함께 새겨져 있는 양덕당(養德堂) 현판은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 씨의 거처에 사용했다. 글자는 영조와 정조 중 한 명이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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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1915년 철거전 돈의문 전경.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사실 현판은 임금의 글자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선조와 숙종은 명필로 유명했다. 창덕궁 영화당(暎花堂)에 걸려 있었던 '청량동해수 간취천심수'(請量東海水 看取淺深愁·동해 바다의 깊이를 잴 수 있지만 내 마음의 근심은 가늠하기 어렵다)가 선조의 작품이다. 경희궁 용비루(龍飛樓)의 '교월여촉'(皎月如燭·밝은 달이 촛불처럼 밝다), 창덕궁 영화당의 '가애죽림'(可愛竹林·사랑함직한 대숲)은 숙종의 글씨다.


정조 때 왕실도서관 역할을 하던 규장각(奎章閣)은 숙종 20년(1694) 왕실계보를 편집하던 종시부 안에 처음 지어졌다. 이때는 도서관이 아니라 왕의 시문과 친필, 고명(임금 유언), 선보(임금과 왕족의 일기장) 등을 관리하던 장소였다. 최초의 규장각 현판은 숙종의 친필이며 이 현판이 고궁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서울시 옥수동 한강변에 있던 만회당(萬懷堂)은 영조의 친필이다. 영조 48년(1772) 왕이 직접 옥수동 두모포에 지어진 정자에 거둥했다가 감회에 젖어 서서당(西書堂)이던 정자 이름을 만회당으로 바꿔 걸게 했다. 고궁박물관 현판 가운데 영조의 글자를 이를 포함해 80여 점에 달한다. 영조는 특히 말년에 많은 현판 글을 적었지만 수준 이하의 것이 많아 신하들의 지적을 받았으며 더러는 신하들이 글자를 고친 뒤 현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의욕은 넘쳐지만 예술성은 떨어졌던 것이다.

창덕궁 수방재(漱芳齋) 편액은 고종의 친필이다. 어필이라는 글자와 함께 주연지보(珠淵之寶)라는 낙관이 있다. 주연은 고종의 호다.

학자들도 이 대열에 다수 참여했다. 어진봉안각(御眞奉安閣)은 정조대의 명재상 채제공(1720~1799)의 글씨다. 정조 16년(1792) 여름 좌의정 채제공이 왕명을 받아 적었다. 어진봉안각은 창덕궁 선원전(璿源殿) 내의 어진봉안각에 달았던 편액이다. 창덕궁 선원전에는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초상이 봉안됐다.

'서대문'으로도 불리는 돈의문(敦義門)은 1915년 일제가 전철을 놓으면서 철거했다. 중구 정동사거리에 위치했으며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고 또한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돈의문의 편액은 영조 25년(1749) 조윤덕의 작품이다.

영은문(迎恩門) 편액은 고궁박물관 현판 중 연도가 제일 앞선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처소인 모화관의 정문 영은문에 붙였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영은문 현판 2건을 써 줬다. 배면의 묵서로 현판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영은문은 조선 말까지 존속하다가 1895년(고종 32년) 2월에 김홍집 내각에 의해 훼철됐고 이듬해 서재필 주도 하에 영은문 옆에 독립문이 건립됐다. 현재 영은문은 독립문 전면에 초석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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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돈의문 현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청나라 황제의 어필도 전해진다. 내용은 치욕적이다. '동쪽의 번국이 아름다음을 이었도다'는 뜻의 동번승미(東藩繩美)는 청나라 최전성기인 6대 건륭제(재위 1735∼1795), '예법으로 교화하여 번국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의 예교수번(禮敎綏藩)은 7대 가경제(재위 1796~1820)가 직접 써서 조선에 선물했다. 두 현판은 사대교린의 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에 있었다.

오랜기간 모두의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800점에 달하는 많은 현판이 지금까지 큰 훼손없이 보존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들 현판 모두는 국가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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