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조선 국새 73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2/18 10:48
수정 2021/02/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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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일제강점기 종묘 정전의 모습. 조선고적도보 11권(1931). 한국전쟁 때 종묘에 보관 중이던 어보를 미군들이 다수 훔쳐 달아났다.

2017년 7월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 등 2과의 어보를 정상회담 성과물로 가져왔다. 대통령은 돌아온 어보를 향해 허리숙여 절을 했다. 2013년 미국에서 그 존재가 확인됐고 문화재청의 요청에 의해 미국 국토안보수사국이 압수한 것들이다.

앞서 2014년 4월에도 방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쟁 때 불법 반출된 황제지보, 유서지보(諭書之寶), 준명지보(濬明之寶) 등 고종의 국새 3과와 어보인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1과를 직접 돌려줬다. 최근엔 지난해 2월 대군주보(1882년 제작)와 효종어보(1740년 제작)를 재미교포에게 기증받아 가져왔다. 이들 국새와 어보를 찾은 곳은 모두 미국이다. 도대체 미국은 무슨 이유로 이를 집중적으로 갖고 있는 걸까.

국새나 어보 모두 '왕의 인장(印章)'을 말한다. 이 둘 간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한 언제부터 사용됐고 얼마나 제작됐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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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문조(효명세자) 어보. 1866년(고종 3).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반영해 몸통은 제후국을 상징하는 거북으로 표현했지만 머리를 용으로 변형해 대등한 위치를 표현했다.

국새(國璽)는 외교문서나 행정에 사용했던 도장이다.


국가의 상징이며 왕위 계승시 선양의 징표인 동시에 외교문서, 교지, 공식문서 등 국사에 사용되던 관인인 것이다. 국왕이 각종 행차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행렬의 맨 앞에서 봉송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어보(御寶)는 의례용 도장이다. 왕과 왕비의 여러 책봉의식이 치러질 때, 그들의 덕을 찬양하기 위한 존호, 시호, 묘호 등이 올려질 때마다 어보를 제작했으며 사후에는 신위와 함께 모두 종묘에 봉안됐다. 국새와 어보는 조선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역사성과 진귀함을 인정받아 2017년 '조선왕조 어보·어책'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국새는 역사가 깊다. 국새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2대 남해 차차웅 16년(서기 19)'조에 실려 있다. 여기에 "북명(北溟·강릉)의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濊王印)'을 주워 임금에게 바쳤다"고 적혀있다. 예는 한반도 동부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이다. 고구려에서도 165년 7대 차대왕이 시해되자 신하들이 왕의 아들을 놔두고 동생(신대왕)에게 국새를 바쳤다고 <삼국사기>는 기술한다. 국새의 전수를 통한 왕위 선양의 전통이 이미 고구려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 들어오면서 외교적 필요에 따라 거란, 요, 금, 원, 명에 책봉과 함께 인장을 받았으며 이 인장이 국새로 통했다. 인장의 글씨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었고 손잡이 모양은 '낙타' '거북' 두 종류였다.


낙타는 '동북방의 민족'을 지칭하며 거북은 제후국의 국새에 사용하는 것이어서 사대관계를 반영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사대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는 즉위년(1392) 명나라에 고려의 국새를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 줄 것을 수차례 청했다. 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태종 3년(1403) 비로소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판 금인장을 보내왔다. 명은 인장의 재료로 금 보다 옥을 더 높게 쳐 황제는 옥을 갖고 제후에겐 금 인장을 줬다. 한국 영화나 소설 등의 영향으로 국새를 옥새라고 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옥새라는 용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 임금의 인장을 얘기할 땐 국새가 옳은 표현이다.

조선은 명에서 국새를 두 차례 더 받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대륙의 새 주인이 된 청나라의 국새를 썼고 역시 총 3과를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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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고종의 국새 황제지보. 1897년(광무 1).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한국전쟁 때 불법반출된 것을 2014년 방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되돌려줬다.

중국의 왕조는 조선을 낮게 여겨 황제의 인장을 말하는 새(璽)나 보(寶) 대신 격이 떨어지는 인(印)자를 새겼다. 힘이 약해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자주적 국가를 굽히지 않아 굴욕적 중국 국새는 대중국 외교문서에만 썼다. 대신 대일본 외교 문서와 국내 통치에 쓰는 국새는 모두 다른 국새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다.

1865년 편찬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과 1876년 제작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등 기록을 살펴보면 총 37과의 국새가 제작됐다. 최고 권위의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조선왕보(朝鮮王寶)를 포함해 일본 외교문서를 위한 소신지보(昭信之寶), 왕의 교서와 인사 발령장용인 시명지보(施命之寶), 과거 문서에 찍은 과거지보(科擧之寶), 왕이 서적을 반포·하사할 때 관련 문서에 이용하는 선사지기(宣賜之記) 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다가 갑오경장 때 제후국 시대의 국새는 모두 폐기되고 대한제국 탄생과 함께 황제국의 지위에 걸맞은 황제지새, 황제지보 등을 비롯해 22종의 국새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대한제국 시기 출간된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전체 목록이 망라돼 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조선의 국체를 말살하기 위해 국새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 광복 이후 미 군정이 그 중 대한국새 등 9과를 찾아내 우리 정부 대표였던 오세창 선생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6과는 분실하고 대원수보,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등 3과만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았다. 고종이 국권 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사용했던 황제지새는 행방을 모르다가 2009년 재일동포에게서 구입해 국립고궁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이를 포함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돌려준 3과, 2020년 2월 재미동포가 기증한 2과, 성암고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사지기(대한제국 이전 국새) 1과 등 현전하는 국새는 총 9과이다. 조선시대 제조된 37과의 국새 중 28과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의례용의 어보는 국새보다 훨씬 수량이 많다. 1555년, 1698년, 1705년, 1909년 각각 작성된 <종묘등록>을 종합하면, 어보는 총 375과가 만들어졌다. 이 중 정종어보, 태종어보 등 9과는 1909년 <종묘등록>에 존재하지 않아 영구분실 가능성이 제기된다. 어보의 상당수는 한국전쟁 과정 중 사라졌다. 한국전쟁 시기 어보들은 종묘에 보관돼 있었다. 전문가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이 종묘에 난입해 훔쳐간 것으로 추정한다. 분실된 상당수가 미국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유다. 종묘 출입문 쪽에 위치한 어보들이 집중적으로 없어진 것도 관심을 끈다. 기념품을 챙기려는 미군 병사들이 다급하게 들고 갔을 것으로 짐작한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뒀다가 사라진 헌종계비 효정왕후 어보 2과와 문조비 신정왕후 어보 4과는 프랑스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종적으로 고궁박물관 323과(환수된 5과 포함), 국립중앙박물관 5과, 고려대 2과 등 총 330과는 파악되지만 45과는 행방불명이다.

어보의 재질은 금, 은, 옥, 백철 등이다. 금보의 경우 구리·아연 합금 등에 도금해 제작했는데 시대에 따라 아연의 함량이 달라졌다. 아연 함량은 15∼17세기 10% 내외였으나 18세기 이후에는 10∼30%였고, 19세기에는 아연 함량 20% 이상인 금보가 많이 제작됐다.

손잡이는 거북형이 대다수이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특이하게도 거북의 머리가 용두형(龍頭形)으로 변형된다. 비록 중국의 극심한 견제로 용모양의 어보를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중국과 대등하다는 인식을 가졌고 이런 의지를 어보에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국새와 어보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10㎝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나 글자 수는 국새가 기껏 4자 정도인 반면 어보의 경우 업적을 기리는 각종 존호, 시호, 휘호, 묘호가 덧붙여져 훨씬 많다. 1902년 종묘에 봉안된 효명세자(헌종의 친부)의 문조옥보는 무려 116자나 된다. 그의 아내 신정왕후 옥보 역시 62자다. 문조옥보와 문조비 신정옥보를 올린 인물은 고종이다. 고종을 왕위에 앉힌 조대비가 바로 신정왕후이다. 깨알 같은 장문의 어보를 바쳐 조대비가 바람 앞 등불 신세의 대한제국과 자신을 다시한번 굽어 살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어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24년(세종 6) 제작된 3대 태종비 원경왕후 금인(고려대 박물관 소장)이다.

국새와 어보 가운데 국보는 없고 국새 황제지보, 국새 유서지보, 국새 준명지보, 어보인 고종황제어새 등 4점만 보물로 지정돼 있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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