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200명 영정 실린 '조선초상화첩'은 왜 일본에 있나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2/25 16:27
수정 2021/02/2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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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충무공 이순신의 7대손 이달해 초상. 영조가 특별시험인 등준시에 합격한 무인들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 준 `등준시무과도상첩`에 수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학자와 관리들은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최고 영예로 여겼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원로 문관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됐다. 일종의 왕립 경로당으로, 오늘날 학술원에 해당하는 기구인 것이다. 기로신에게는 전토, 노비 등 특전이 내려졌고 주요 국사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다.

그런데 조선 21대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가 이 기로소에 들어가고자 했다. 당시 영조의 나이가 51세로 기로소에 입소하기에는 너무 젊어 논란이 됐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60세에, 영조의 아버지 숙종이 59세에 기로소에 들어간 전례가 있을 뿐이었다.


1744년(영조 20) 7월 29일자 실록에서 영조는 "59세가 되어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게 되기를 원하고 있지만 어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는가"며 "노쇠하고 고질병을 앓고 있다.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는) 이것은 지극한 소원"이라고 간절함을 나타냈다. 영조는 호학군주를 자처했다. 따라서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자신도 이름난 학자가 됐음을 과시하고 또한 신하들에게 최고 학자로서 존경 받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우의정 조현명은 "하교가 너무 번거럽다. 오직 삼가는 마음으로 극진히 정신을 수양하고 천성을 바르게 하기를 바란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하지만 영조는 두달 뒤인 9월 기어코 자신의 기로소 행을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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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1744년 영조가 51세의 나이로 기로소(일종의 왕립 경로당)에 들어가면서 이를 기념해 제작한 `기사경회첩` 표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사경회첩에는 8명의 원로대신들의 반신상이 담겨져 있다. 국보도 보물도 아니다. 이를 포함해 다수의 초상화첩이 전해져 온다.

영조는 자신이 기로신이 된 것을 기념해 베푼 연회 등 행사장면을 그린 그림과 기로대신의 초상화를 함께 꾸민 화첩인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을 제작해 배포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이 때의 화첩 두점이 전한다. 하나는 1924년 이순영, 나머지 하나는 1921년 이성혁에게서 구입했다.

화첩에는 어첩자서(御帖自序), 어제어필(御製御筆)을 시작으로 여섯 명의 기로신들이 지은 축시,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 행사도 5점, 기로신들의 좌목(座目·서열), 초상화 8점, 제작에 관여한 감조관(監造官), 서사관(書寫官), 화원 명단이 적혀있다. 초상화는 기로신 8명의 반신상이다. 영의정 이의현(1669~1745), 판중추부사 신사철(1671~1759), 형조판서 윤양래(1673~1751), 지중추부사 이진기(1653~?), 예조판서 정수기(1664~1752), 공조판서 이성룡(1672~1748), 의정부좌참찬 조원명(1675~1749), 판돈녕부사 조석명(1674~1753)이다. 초상화 제작에 참여한 화원은 장득만, 장경주, 정홍래, 조창희 등 어진화사들이다. 기사경회첩은 당대 최고의 궁중 예술가들이 최고급 재료를 써서 제작한 궁중행사의 공식기록화인 것이다.


조선후기 문화의 품격을 대변하는 뛰어난 작품임에도 여태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조선은 '초상화의 나라'였다. 그러다 보니 조선 초상화는 남아있는 수량이 많으며 그 가운데 수작도 적지않다. 기사경회첩처럼 다수의 초상화가 실린 초상화첩도 여러점 전해오고 있다. 초상화집의 대표격은 단연 국보 제325호 '기사계첩(耆社契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2003년 3월 성문종합영어 저자 송성문 씨가 기증했다.

기해년인 1719년(숙종 45) 만들어져 기해기사첩(己亥耆社契帖)으로도 불린다. 앞서의 언급처럼 19대 숙종(1661~1720·재위 1674∼1720)이 59세 되던 1719년 기로소에 들어간 일을 기념해 발간됐다. 구성은 기사경회첩과 흡사하다. 초상화는 역시 반신상으로 기로신 10명이 실려있다. 영의정 이유(1645~1721)·김창집(1648~1722)·정호(1648~1736), 우의정 김우항(1649~1723), 이조판서 황흠(1639~1730), 대제학 강현(1650~1733), 좌참찬 홍만조(1645~1725), 형조판서 이선부(1646~1721), 공조판서 신임(1639~1725)·임방(1640~1724)이다. 이 중 김창집은 척화파 김상헌의 증손이고 강현은 강세황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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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기사경회첩`에 실린 기로대신 중 최고령자인 지중추부사 이진기 반신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시 그의 나이는 92세였다.

기사계첩은 총 12부가 만들어져 1부는 기로소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기로신들에게 나눠줬다. 지금까지 소재가 확인된 것은 국보 제325호, 보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또다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개인소장본(국보 제334호), 이화여대박물관본(보물 제638호), 호암미술관본 등 총 5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은 특이하게 무신들의 초상화집이다. 영조대 등준시 무과 합격자의 반신상을 모아 놓은 것이다. 1774년(영조 50) 음력 1월 15일,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는 특수목적의 등준시(登俊試)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대상은 종1품 이하 당상관 3품까지의 문무반 관리들이었다. 영조는 조정의 관리들이 늘 학문과 무예에 매진하도록 고위직이 솔선수범해 시험을 치도록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문과 15명, 무과 18명 등 총 33명의 급제자가 배출됐다.


영조는 사흘뒤인 18일 "문과의 도상은 예조에, 무과의 도상은 병조에서 간수하라. 8개월 후 전례대로 의정부에서 연회를 내리겠다"면서 "1월 25일 문무과 도상첩 한 짝을 들여라"라고 명했다. 공신도 아닌 과거급제자 전부에게 초상화를 나라에서 그려주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도상첩 중 문과 도상첩은 남아있지 않고 무과도상첩만 온전한 상태로 전한다. 도상첩은 영조의 '전교', 합격자 명단인 '무과방목(榜目)', 18명의 초상화, 화원 명단의 순으로 배치됐다. 합격자는 성적순에 따라 장원인 갑과 1명, 을과(2등급) 3명, 병과(3등급) 14명으로 나열돼 있다. 1등은 가의전주부 이춘기(1737~?)이고 을과는 절충전수사 민범수(1717~?), 가선전병사 조완(1724~?), 가선함춘군 이창운(1713~1791) 순이다. 병과는 절충전병사 안종규(1723~1778), 절충전수사 최조악(1738~?), 정헌행부사직 이장오(1714~?), 가의부총관 최동악(1745~?), 가선행부사직 이윤성(1719~?), 가선행부호군 이국현(1714~1780)·유진하(1714~?)·민지열(1727~?)·이명운(1716~?)·이방일(1724~1805)·이달해(1730~?)·김상옥(1727~?)·조집(1735~?), 절충전병사 전광훈(1722~?) 순이다. 병과 11등을 한 이달해는 충무공 이순신의 7대 손이다. 그는 전라우수사, 전라병마절도사, 강계부사를 지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천재 소년화가의 초상화집도 수장돼 있다. 임희수(1733~1750)가 그린 '칠분전신첩(七分傳神帖)'이다. 장지연의 <진휘속고(震彙續考)>는 임희수가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화가였던 표암 강세황(1713~1791)을 능가하는 실력이었다고 서술한다. 임희수는 조상 대대로 조정의 요직을 섭렵한 서울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는 예술가적 감수성이 뛰어났고 화가로서 재능이 탁월해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이었다. 미인박명이라는 말도 있듯 임희수는 탁월한 예술적 소질을 활짝 펼쳐 보지도 못한 채 18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화첩에는 17점의 유지초본(기름종이에 그린 초상화 밑그림)과 1점의 유탄으로 그린 사본, 강세황 초상화 1점 등 총 19점의 초상화가 수록돼 있다. 임희수의 부친 임위가 아들이 죽자 생전에 그렸던 초본을 모아 첩으로 만든 후 각 초상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남겼다. 그림들은 임희수가 세상을 뜨기 직전인 1749년, 1750년 두 해에 걸쳐 그려졌다. 초상화는 임수륜, 임순, 임정 등 임 씨 집안 사람들과 윤휘정(참판), 윤광의(참판), 남태량(대사헌), 이식(세제익위사 익위) 등 고위직 관리, 그리고 이름이 파악되지 않는 인물 8명 등이다. 강세황은 임희수의 큰 아버지 임정과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천재화가 임희수는 속필로 한 두 번 보고 쓱쓱 그렸다. 그러면서도 눈자위와 코, 눈과 눈썹, 입술, 인중의 길이 등 인상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를 예리한 관찰력으로 정확히 포착해 냈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대강 담묵으로만 칠했는데 모두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문인 초상화집이 다수 존재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3권의 문인 초상화첩이 보관돼 있다. 효종~영조대 활동했던 유력인사 초상화 10점이 담긴 '초상화첩'(19세기), 영·정조대의 관리들 모습을 그린 초본 33점의 '명현화상'(18세기), 역시 영·정조 시기 고관을 지낸 23인의 초상화가 실린 '해동진신도상(海東搢紳圖像)'(18세기 후반)이다. 초상화첩과 해동진신도상은 각각 1910년, 1917년 일본인, 명현화상은 1926년 박준화에게 구입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19세기초 그려진 것으로 짐작되는 초상화첩 2첩이 있다. '선현영정첩'에는 숙종에서 정조대 활약한 고위관리 10명, '진신화상첩'에는 영조에서 순조 연간에 활동한 22명의 관리가 그려져 있다.

놀랍게도 일본 덴리대 도서관이 200명이 넘는 초상화를 수록한 '조선명현초상화첩' 4권을 갖고있다. 화첩은 조선말 세도가 조인영(1782~1850)의 소유였지만 그의 증손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방대한 수량의 초상화집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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