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석굴암 본존불 빼닮은 통일신라의 또다른 걸작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3/15 09:35
수정 2021/03/1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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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통일신라 철불 앞에서 포즈를 취한 가수 싸이. 통일신라 철불은 201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개최된 `황금의 나라, 신라`에 메인 전시품으로 출품돼 많은 인기를 모았다. 사진 매경DB.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최고봉이 국보 제24호 석굴암 본존불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석굴암 본존불이 석불의 대표주자라면,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금동불의 얼굴인 것이다.

신라말기부터 고려초까지 짧은 기간 등장했다가 사라졌던 철불(쇠로 주조한 불상)에서도 앞의 두 작품에 비견될 명작 불상이 전해져 온다. 지금 당장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 없지만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숨겨진 걸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높이 1.5m의 '통일신라 철조여래좌상(이하 통일신라 철불)'이 그것이다.

이 불상은 전체적인 형태가 석굴암 본존과 매우 닮았다. 뿐만 아니라 넉넉한 얼굴 표정, 사실적인 천의 주름 모양 등 빼어난 주조기술은 철불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하다.


철불들은 대체로 신라말기인 9세기 이후에 유행하지만 이 불상은 불교조각의 전성기인 8세기 통일신라의 흔적을 잘 간직해 특별히 '통일신라 철불'로 지칭된다.

신라말기에 접어들면 치열한 왕권다툼이 벌어져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해진다. 중앙의 절대왕권이 쇠퇴하는 대신 자체적으로 사병을 보유한 지방호족 세력이 부상한다. 이 시기 종교적으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당나라 유학승들이 귀국해 중국에서 유행하던 선종(禪宗)을 본격 도입하면서 경전·귀족 중심의 신라불교에 충격을 던진다.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도 수행을 통해 마음을 교화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의 교리는 지방의 호족들을 자극한다. 호족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지역에 사찰을 건립하고 중국에서 돌아온 선승들을 맞아들이면서 선종불교가 지방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불상도 오대산, 천태산 등 중국 불교 성지에서 널리 조성됐던 철불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말기인 9세기 중반 이후부터 고려초까지 실상사, 성주사, 보림사, 봉암사 등의 지방선종 사찰을 중심으로 철불이 집중적으로 주조됐다.

철불은 제작이 어려운 대신 조성비용이 구리를 주재료로 한 금동불보다 적게 드는 장점이 있다. 왕실이 아닌 지방의 유력자들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재료인 쇠를 이용해 불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쇠는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들의 무기나 용구들을 제작하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금속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금동불은 손에 잡히는 작은 크기가 대부분이지만 철불은 2m가 넘는 거대불상도 많다. 다만 쇠는 가공하기 힘들어 이를 불상으로 만들려면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야 한다. 당시엔 용광로가 없어 쇠를 여러 개 도가니에 넣어 1200도 이상 온도로 녹인 뒤 동시다발로 부어 주조했다. 중간에 멈췄다 다시 부으면 불상이 깨지기 십상이었다. 이런 제약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이 보다도 훨씬 늦은 13세기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전문가들은 중앙에 철불을 제조하는 조직적인 장인 집단이 존재했으며 부유한 지방 호족들이 이들을 초청해 불상을 만들게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철불 얼굴은 전형적인 금동불 형태를 벗어나 인상이 모두 제각각이면서 개성적이다. 때문에 돈을 시주한 공양주 얼굴을 불상에 담았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철불은 특징적으로 가슴과 배에 돌출된 접합선을 있다. 불상 주조 과정에서 철물이 바깥틀 이음 부위 사이로 배어 나와 생긴 선이다. 철보다 더 단단한 끌이나 정 등 도구가 없어 주조시 생긴 흔적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공정이 어려워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손 부분은 나무로 조각해 붙이기도 했다. 주조물 위에 옻칠하고 금박을 입혀 불상을 최종적으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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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통일신라 철불. 국보 제24호 석굴암 본존불,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3대 불교조각 명품`으로 꼽힐만 하지만 아직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있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일신라 철불은 이같은 철불의 출발선상에 있는 불상으로 불교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교 조각은 국보 제24호 석굴암 본존불이 탄생한 8세기 중반 통일신라시대를 정점으로 예술적으로나 기교적으로 퇴보해 형식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통일신라 철불은 생동감 넘치는 얼굴, 미끈한 눈과 눈썹선, 장대한 어깨와 양감이 넘치는 가슴, 결가부좌한 다리의 넘치는 볼륨감 등 석굴암의 본존과 비슷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착의법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켜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 버린다는 의미를 담은 손모양)의 수인, 다리 사이로 펼쳐진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 등 형식 면에서도 석굴암 본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철이라는 재료의 제한적 요소를 고려할 때 팔뚝에 자연스럽게 표현된 옷주름 등은 석굴암 본존상을 능가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따라서 이 철불의 제작 시기를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8세기 중엽으로 비정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그 이전인 8세기 초부터 철불이 조성됐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철불이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를 알려주는 잣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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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보원사지 철불좌상. 우는 얼굴을 하고 있어 `못난이 불상`으로도 불리며 관람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또다른 철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 매경DB.

통일신라 철불은 해외에서 진가를 인정 받았다. 철불은 2013년 연말부터 2014년 연초까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하 메트)에서 열린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에 출품한 바 있다. 전시회는 메트 특별전시실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한국 미술전인 동시에 신라를 주제로 서구에서 열리는 첫 기획전이었다. 그에 걸맞게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191호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제90호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국보 제79호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보물 제635호 계림로 보검 등 대한민국의 '간판급 문화재'가 총출동했다. 그런데 현지 전문가들은 전시회에서 이들을 제쳐두고 통일신라 철불을 주목했던 것이다. 미국 미술사학자들은 "금동불(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느낄 수 없는 장엄미가 일품이다. 어둡고 거친 느낌의 철 재질과 고도의 조각 기법은 서양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통일신라 철불은 애초 1918년 충남 서산군 보원사지에서 조선총독부로 옮겨온 것으로 구전돼 왔다. 그래서 '전 보원사지 철재여래좌상'으로 오랜기간 통용돼 왔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고려 4대 광종(925~975·재위 949~975)의 스승인 법인국사 탄문(900~975)이 949년 석가 삼존 금상을 조성해 보원사에 봉안했다"는 '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비'의 기록이 근거가 됐다. 그러나 보원사에서는 철불 좌상이 이미 한구가 수습돼 통일신라 철불은 보원사 불상이 아닌 것은 명확하다.

실제 1920년에 출간된 '박물관진열품도감'에 1918년 3월 보원사지에서 옮겨진 것으로 기술된 보원사 불상(정식명칭 '보원사지 철조불 좌상')은 높이 2.57m의 거대불상이다. 몸통에 비해 큰 머리 등 이상적 비례미를 탈피해 개성과 인간미가 넘친다. 특이하게도 얼굴을 찡그리는 형상을 하고 있어 '못난이 불상'으로 불리며 관람객에게 인기가 높다. 역시 국보, 보물 등 국가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법인국사탑비에 철불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이 불상이 확실하며 당시 철불을 조성해 그위에 금박을 칠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시대의 발전된 주조술을 잘 보여주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도 국적 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통일신라 철불은 언젠가 구체적인 제작시기와 봉안됐던 사찰·지역이 밝혀질 수 있을까.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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