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선덕여왕이 노년의 나이에 결혼했던 이유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4/08 14:14
수정 2021/04/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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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일제강점기의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분황사와 영묘사, 황룡사 9층목탑, 첨성대 등 일련의 국가사업을 마무리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국력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외세에 의존한 외교정책을 추구했다는 비판과 함께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그런 선덕여왕은 즉위 전 당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태종은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신라에 보내왔다. 선덕여왕이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면서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하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했다.


꽃이 피니 과연 왕의 말대로 향기가 없었다고 사서들은 기술한다. 당태종은 향기가 없는 모란꽃에 비유하면서 여자이자 짝(벌, 나비)이 없는 선덕여왕을 조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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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현재의 분황사 모전석탑. 사진 배한철.

그런데 선덕여왕은 남편이 있었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篇)'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 선덕여왕의 배필"이라고 적고있다. 아버지 진평왕(재위 579~632)이 53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던 만큼 그의 맏딸인 선덕여왕도 즉위때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이세민의 놀림을 받고 뒤늦게 결혼을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논평했다.

선덕여왕은 사실 능력이나 정치적 리더십이 탁월해서 왕이 된게 아니다. <삼국유사>는 "성골남자가 없어 여왕이 즉위했다"고 밝히고 있다. 선덕여왕은 따라서 즉위초 여성으로서 신하들의 반발과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로 고전했을 게 분명하다. 선덕여왕은 재위 1~2년 연속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그러면서 재위 3년(634) 음력 1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꿔 자주국을 천명했으며 동시에 황룡사 북쪽에 조성 중이던 사찰을 완성해 분황사(芬皇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분황사는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다.


선덕여왕은 황제로서 권위를 과시하고 지혜로우면서도 어진 자신의 진면목을 만천하에 드러내 즉위 후 끊임없이 제기됐던 자격시비 논란을 잠재우고자 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혼이 깃든 분황사는 소규모이지만 아름다우면서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교대중화의 선각자이자 한국 지성사에서 탁월한 대학자인 원효대사가 머무르면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분황사 경내 한가운데 신라 석탑 중 가장 먼저 세워졌다는 모전석탑이 있다. 634년 분황사 창건당시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의 정식이름은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이다.

'전탑(塼塔)'은 뜻 그대로 흙벽돌을 구워 쌓아 올린 탑이다. 반면 '모전탑(模塼塔)'은 벽돌의 전탑을 모방해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았다. 모전탑인 분황사석탑의 돌은 검은 회색을 띠는 안산암(安山巖)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전탑은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 시작했으며 지금도 유적이 인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도 전래됐으며 숭악사 12각15층탑(523년 조성)을 비롯해 중국 여러 지역에 전탑이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조성되기 시작해 통일신라 때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후 고려시대에도 건립됐다. 그러는 와중에 전탑을 모방한 모전탑이 등장했다. 모전탑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탑의 양식이다.

사실 분황사 모전탑은 우리나라 불교 탑의 발전 양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탑의 발달은 대체로 목탑, 석탑의 순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신라는 특이하게도 전탑과 모전석탑이라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쳐 석탑으로 발전해 간다.


<삼국유사> 양지사석(良志使錫)조는 신라 최고의 조각가이자 화가, 서예가인 승려 양지를 소개하면서 "(양지는) 영묘사(경주 서악동에 있던 사찰)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 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불교의 여덟 수호신)과 법림사(안동 운흥동에 있던 사찰)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이 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모전탑)를 만들었고,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고 했다.

양지가 모전탑을 처음 세웠는데 그 이전에 전탑이 존재했고 이 탑의 기와를 양지가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전탑이 모전탑을 앞서는 증거로 인용된다. 대표적 모전탑인 분황사탑이 7세기 전반에, 대표적 전탑인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1세기 가량 늦은 8세기에 조성된 것을 볼 때 '전탑-모전탑'의 순서는 대체적 경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돌 다루는 기술이 앞섰던 백제는 전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목탑에서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신라도 통일이후 석조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전탑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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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안동 법흥사지 전탑. 고가와 철도에 둘러쌓여 있다. 사진 문화재청.

전탑과 모전탑을 통틀어 백미로 꼽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높이가 9.3m이다. 지금은 3층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을 것을 짐작된다. 동서남북으로 석문이 달려있는 공간은 감실(불상을 안치한 방)이다. 석문 양쪽에 서 있는 악귀를 막아주는 불교의 수호신 인왕상을 조각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은 반라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석탑의 모서리에는 수호의 기능과 함께 부처의 계율을 상징하는 힘찬 사자상을 두었다.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암사자,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숫사자가 있다. 모두가 신라인의 섬세하고 빼어난 조각 기술을 마음껏 뽐낸 수작이다.

탑은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됐으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승려가 수리하려다가 오히려 더욱 파손시켜 1915년 재차 손을 봤다. 이때 2층과 3층 사이의 사리를 넣는 공간에서 사리장엄구와 구슬, 실패, 바늘, 침통, 가위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전탑과 모전탑은 건립된 수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료의 취약성에서 오는 파괴와 훼손이 심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20점도 채 되지 않는다. 안동 법흥사지 7층전탑은 전탑 중 유일한 국보이다. 7층에 높이 17m의 거대한 탑이다. 법흥사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 창건됐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이 있다.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도가 바로 옆에 생기면서 열차 진동으로 지속적으로 기울고 있다. 1962년 국보 지정 때 옆 동네 명칭이 잘못 붙어 한동안 '신세동 7층 전탑'으로 불리기도 했다.

국보 모전석탑은 분황사 모전석탑과 영양 산해리 5층모전석탑(국보 제187호) 2점이다.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역시 시기는 통일신라로 추측한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잘 이루고 있으며 축조방식이 정연해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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