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기인화가 김명국은 평생 궁궐서 근무한 엘리트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4/15 16:38
수정 2021/04/15 18:03
364177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사진1.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달마도로 불리는 `김명국 필 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명국은 조선 최고의 기인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평생 궁궐 도화서에 근무한 `엘리트 화가`였다.

'달마도'의 작가 연담 김명국 하면 우리는 항상 말술을 마셨고 또한 술기운을 빌려 신필의 솜씨를 뽐내던 조선 최고의 기인화가로 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잘 나가는(?) 왕실화가였다. 20대부터 60대 사망하기까지 거의 평생을 도화서 화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궁궐행사 그림과 공신 초상화 등을 도맡아 그린 '엘리트 화가'였고 벼슬에서도 기술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같은 도화서 화원이면서도 색주가의 그림을 즐겨 그리다가 일찌감치 궁에서 쫓겨나 저잣거리를 떠돌아야만 했던 혜원 신윤복과 삶이 대비된다. 대체 어떤 것이 김명국의 참모습인 걸까.

1870년 발간된 <동국문헌록>에 "김명국은 1600년(선조 33)생이며 본관이 안산"이라고 기술돼 있다.


그리고 또다른 기록에 1633년(현종 4) 이조참판 강백년을 방문해 산수도를 그렸다고 돼 있어 1663년까지는 생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러 번 개명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의궤 등 각종 문헌을 살펴보면, 김명국은 명국(明國), 명국(鳴國), 명국(命國) 3가지 이름을 쓰고있다. 일본의 자료인 <고화비고(古畵備考)>는 "1643년 화관김명국(金明國)으로 이름을 고치고 호는 취옹(醉翁)이라고 했다. 인물화는 '연담(蓮潭)'이라고 낙관하고 쇠도장은 '연담김씨명국인'이라고 했으며 수묵화에는 '취옹'이라 낙관하고 쇠도장은 '김명국인'이라고 했다"고 서술한다.

364177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사진2. 김명국이 금가루로 그린 `사시팔경도`. 1662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필 김명국은 산수화도 잘 그렸다.

그는 일찌감치 화재를 인정받아 도화서 화원으로 뽑혀 대궐에 들어갔다. 규장각 의궤를 종합하면, 화원으로서 최초 기록은 1627년(인조 5)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와 소무녕사(昭武寧社·이인거, 유효립 등 역모사건 진압) 공신 녹훈 초상화 제작에 참여한 일이다. 1627년이면 28세 되던 해로, 이로 미뤄 볼때 김명국은 20대 중반 이전에 이미 도화서에 근무했을 것이다. 이어, 1635년 원종인헌왕후부묘도감의궤, 1644년 영국공신(寧國功臣·심기원, 권억 등 반정사건 평정) 공신 녹훈 초상화, 1645년 효종왕세자빈궁책례(책봉)도감의궤, 1649년 인조국장도감의궤, 1651년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1659년 효종국장도감의궤, 1661년 효종부묘도감의궤 제작 등 굵직굵직한 국가행사 의궤가 제작될 때마다 주요 화원으로 참여해 그림을 그렸다. 특히 만년인 1661년에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해 무려 30여 차례나 선발되기도 했다. 그 공로로 기술직 한계 품직인 종6품 교수를 뛰어넘어 정6품 사과(司果·오위에 딸린 무관직)까지 벼슬이 승격됐다.

김명국은 경쾌한 붓놀림으로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도화서 화원 이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실적 묘사에서 매우 탁월했다. 다음 일화는 그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영조때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1698~1773)의 <뇌연집>에 의하면, 인조가 노란 빗을 건네며 무늬를 새겨 넣으라고 명하자 김명국은 무언가를 그렸다. 어느 공주가 그 빗 가장자리에 머릿니 두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는 손톱으로 눌러 죽이려고 하다가 자세히 보니 그림이었고 이 일로 김명국은 삽시간에 궐내에서 유명해졌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의 화풍은 30·40대때 일본을 다녀오면서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636년 조선통신사 부사 김세렴(1593∼1646)의 <동명해사록>, 1928년 간행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고화비고(古畵備考)>에 따르면, 김명국은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으로 1636년(인조 14), 1643년(인조 21) 두 차례 일본에 다녀왔다.

당시 일본에서는 선종화(禪宗畵)가 유행했다. 선종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불교 종파이다. 선종화는 수묵 위주의 빠른 필치로 단순하게 그리지만 대상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표출하면서 강력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소재는 달마(선종의 시조), 한산(당나라 선승), 풍간(당나라 선승), 습득(당나라 선승), 포대(후량의 선승), 나한(부처의 경지에 오른 불제자), 십우도(본성을 구하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그린 선종화) 등이 그려졌다. 선종화는 중국 오대(907~960)와 남종대(1127~1279)에 성행했고 15세기 무렵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지만 이 시기 불교가 발달했던 일본에서 오히려 크게 발달한다. 선종화는 조선회화사에서는 유독 김명국과 한시각(효종때 도화서 화사) 등 도일 화가들에 의해 두드러지게 그려졌다. 일본의 요구에 따라 당시 그곳에서 풍미했던 선종화를 자주 그리게 됐고 이것이 조선에서도 선종계통의 그림이 그려지게 된 동기가 됐을 것으로 이해된다.

364177 기사의 2번째 이미지 이미지 크게 보기

사진3. `은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순하지만 대범하고 즉흥적인 붓놀림으로 고도의 기교미를 뽐내고 있다.

김명국은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절파(浙派)화법에 뛰어났다. 절파는 명나라 중기 절강성의 기법으로, 거친 필묵, 강한 농담(濃淡)의 대비, 클로즈업된 인물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 김명국은 일본인들이 요청하는 그림을 일필휘지로 그려줬고 이것이 일본인들의 구미에 딱 맞아 떨어져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그림을 구하려고 몰려드는 일본인들로 인해 김명국은 큰 고초를 겪었다. <동명해사록> 1636년 11월 14일자는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김명국이 울려고 했다"고 소개한다.


1643년 방일도 일본 측의 공식적 요청으로 이뤄졌다. 김명국의 인기와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두번째 일본행은 순전히 그들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은 "연담 같은 사람이 오기를 바란다"고 특별요청했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김명국은 통신사를 따라 다시 일본으로 보내졌다. 화원이 일본에 두번 간 예는 김명국 밖에 없었다. 심지어 일본이 1662년(현종 3) 동래부사를 통해 김명국의 그림을 사가려고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호를 취옹(醉翁)이라고 지었을 만큼 '김명국' 하면 술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는 말술을 마셨으며 술에 취한 후 붓을 휘둘러야 필치가 더욱 자유분방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에게 술은 예술적 감성을 극대화하는 매개체였다. 조선후기 문인 겸 미술평론가 남태응(1687~1740)의 <청죽화사>에 의하면, 한 일본인이 세 칸의 건물을 짓어 그곳에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금물을 준비해 그를 초빙했다. 그런데 김명국은 술부터 찾더니 취하도록 마신 뒤 금물을 벽에 뿜어서 다 비워버렸다. 주인은 그 모습에 실망감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자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어느 순간 생동감 넘치며 신묘한 느낌마저 감도는 대작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보기 위해 인파가 쇄도했다. 그 왜인의 자손들은 혹 그림이 훼손될까 기름막으로 덮어 애지중지 보호했고 조선 사신이 가면 먼저 열어 보이면서 자랑거리를 삼았다.

김명국은 중국의 절파를 기본으로 하면서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종화풍을 수용해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구축했다. 작품은 신선이나 고승 등 선종계통의 도석(道釋)인물, 산수인물화가 많다. '달마도'가 그런 그의 대표작이다. 달마는 남인도 출신 승려로 원래 이름은 보리달마(산스크리트어 보디다르마)이다. 서기 640년경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파했으며 선종을 처음 창시한 인물로 잘 알려져있다.

달마도(83×52㎝)는 '세계 최고의 달마도'라는 찬사를 받는 불후의 명작이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을때 그려 남겨두고 왔던 작품 중 하나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구입해 갖고 있다. 상반신만 4분의 3 측면관을 포착해 두건을 쓰고 눈을 부라리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달마의 시선은 영원의 진리를 갈구하는 선승의 구도심(求道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거칠 것 없는 호방함, 시원스러운 묵선과 여백의 조화는 한치의 오차도 없으며 박력 넘치는 굵다란 옷주름 선 역시 기백있는 얼굴 모습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그림은 대범하고 즉흥적이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은사도(隱士圖)'는 달마도 못지 않은 걸작이다. 김명국의 만년 작품으로 두건을 쓰고 대지팡이를 짚으며 어디론가 가는 은일자의 뒷모습을 담고있다. 연담의 대범한 기운은 찾아보기가 어렵고 달마도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높은 철학적 경지가 풍긴다. 도석 인물화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달마절로도강(折蘆渡江·갈대 한가지 잘라타고 강을 건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수노인(수명을 관장하는 수성노인)',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의 '박쥐를 날리는 신선' 등도 있는 데, 역시 특유의 힘차고 대담함을 잘 보여주는 수작들이다.

산수 인물도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중귀려(雪中歸驢·눈내린 길을 나귀타고 돌아오다)', 개인 소장의 '심산행려(深山行旅·깊은 산속을 여행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탐매도' 등이 있다.

김명국은 산수화에서도 대작을 남겼다. '임인추(壬寅秋) 연담'라고 적힌 '사시팔경도'( 41.8×30.2cm·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임인추는 '1662년 가을'을 말한다. 그림은 초춘, 만춘, 초하, 만하 등 각 계절마다 두폭씩 총 8폭으로 구성돼 있다. 검은색 비단이나 종이에 금박을 아교에 갠 안료인 이금으로 그린 이금산수화이다. 이금은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한다. 매우 정교한 필치와 기교가 돋보이는 수작으로, 이전의 작품과 전혀 다른 조선 전기 화단의 부드러운 안견파 화풍의 그림이다. 노년기 그의 또다른 면모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김명국은 인물화와 산수화, 화조화, 사군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지금 남은 것은 일본에 있는 13점을 포함해 30점이 채 안 된다. 그의 작품 중에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은 없다.

[배한철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