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그많던 낙랑국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배한철 기자
입력 2021/04/23 14:40
수정 2021/04/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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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평남 대동군 정백리 제127호분을 조사중인 일본 조사단. 1932년. 127호분은 `낙랑태수연왕광지인`이라는 도장이 출토돼 흔히 `왕광묘`로 불린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역대 왕조 중 한나라(BC 206~AD 220)를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그들 스스로를 한족이라 말하면서 한나라를 민족 정체성의 출발점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유물이 나왔던 장소는 의외로 한반도였다. 1968년 중국 하북성 만성의 유승(劉勝) 묘, 1970년 호남성 장사시(長沙市) 교외의 고분에서 한나라 문물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평양 근교 대동군 대동강면을 중심으로 한 낙랑 고분군에서다.

낙랑(樂浪)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한나라 제7대 무제(BC 156~BC 87)가 BC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식민통치기관인 한사군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낙랑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낙랑 직전의 국가인 고조선이 어디에 있었느냐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재야 쪽에서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라는 <사기> '태강지리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요서설'을 제시한다. 낙랑의 서쪽 국경에 갈석산이 있다는 것이다. 갈석산은 북경 근처 요서지방에 있는 산이다. 요서의 갈석산은 낙랑의 영토이고 결국 고조선도 요서에 위치했다는 주장이다.

반면 마지막 고조선의 왕조인 위만조선의 수도가 평안도 평양이었고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한 뒤 낙랑이 들어선 곳도 평양 주변이라는 게 주류학계의 입장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집중적으로 발굴된 평양 일대의 낙랑유적을 증거로 제시한다.

낙랑유적은 평안도와 황해도 일원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일제강점기 조사보고서에서 평양 근교와 황해도에 걸친 낙랑고분은 총 1400여 기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조사작업은 동경제국대 조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가 주도했다.

1909년 10월 고적조사차 평양에 들른 세키노는 대동강 남안인 대동강면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들이 몰려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조수 2명을 데리고 조사해 보니 과연 오래된 무덤이 널려 있었고 그중 2기를 골라 시굴에 들어갔다. 벽돌로 꾸민 무덤방에서는 거울을 비롯해 무기, 토기 등 한나라 시대 유물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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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석암리 금제 띠고리. 국보 제89호, 낙랑시대(1, 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근교 평남 대동군 석암리 제9호분에서 출토됐다.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듬해 가을 또다른 낙랑고분에서도 많은 발굴품을 찾아냈다.


이어, 1911년 10월 황해도 사리원 근처 조사에서는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과 대방군의 관청터(治址)가 발견된다. 1913년 9월에는 평안도 진남포와 황해도 봉산군의 유적·고분을 파내 한대의 와당, 복식품, 동기, 도기, 칠기, 옥석기, 무기 등 풍부한 부장품을 챙겼다.

1916년 세키노는 탁지부 차관인 아라이 겐타로(荒井 賢太郞, 1863~1938)의 지원을 받아 정식 발굴대를 구성하고 평양 대동군 석암리 낙랑고분 10기를 발굴한다. 막대한 양의 부장품과 함께 예상치도 못한 대수확을 건져올렸다. 바로 제9호 고분에서 수습된 금제 띠고리,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버클)다. 1962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던 유물 116점을 한꺼번에 국보로 등재하면서 국보 제89호에 지정됐다.

섬세한 순금 세공에 비취를 박은 교구는 한대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발견이라는 찬사가 쇄도했다. 길이 9.4㎝, 너비 6.4㎝이며, 금실과 금 알갱이로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여섯 마리를 만들었다. 용과 용 사이에는 꽃잎 모양의 윤곽을 만들고 그 속에 비취옥을 끼워 넣었는데 현재 7개만이 남아 있다. 금실을 이용해 장식하는 누금(鏤金)세공의 수법이 매우 뛰어나며, 용 7마리의 배치도 율동적으로 표현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낙랑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는 엉뚱한 소문이 퍼지면서 1920대 초중반 불법 도굴업자들이 난무하는 최악의 '대난굴 시대'가 전개된다. 평양시민으로서 낙랑 거울과 낙랑 토기항아리 한 개쯤 없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말까지 떠돌 지경이었다. 낙랑고분 조사보고서도 "1400기의 고분 중에서 도굴을 면한 것은 겨우 140기뿐"이라고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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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낙랑 점제현 신사비. 평남 용강군 소재.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곡식이 풍성하고 백성이 모두 편안하기를 신에게 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한서> `지리지`에 점제현은 낙랑군 25현 중 하나로 표시돼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 고적 조사단이 발견했다. 이 비석은 낙랑이 평양 주변에 있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재야 쪽에서는 한반도 서북부에서 쏟아져 나온 한대 유물, 즉 낙랑의 유물을 부정한다.


세키노 다다시가 한대의 도굴품 등을 중국에서 들여와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점,수십점이면 몰라도 유물은 추정이 힘들 만큼 엄청난 양이다. 일본으로 반출된 출토품의 규모는 가늠조차 힘들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수장고에 수많은 낙랑유물을 보관 중이며 그 중 대외에 공개하고 있는 것만 3000점이 훨씬 넘는다. 광복 이후 출토된 것도 적지 않다.

낙랑이 평양에 있었듯, 고조선도 평양에 있었을까. 고조선의 중심지를 놓고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는 설, 요하 유역에 있었다는 설, 처음에는 요하 유역에 있었다가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침입을 받고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 대립된다.

고고학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비파형 청동검을 살펴보면 고조선의 영역을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과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 다양한 동이계 부족들의 산물이다. 길림 장춘에서 한반도 남단, 서로는 북경까지 장대한 지역에서 출토됐다. 국내 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단경식(短莖式·자루 부분이 짧은 검)은 요하 동쪽에서 주로 발굴되며 특히 요녕성에 집중된다. 고고학계는 이 단경식을 고조선 것으로 평가한다. 요녕성 신금현 쌍방(雙房)과 요양의 이도하자(二道河子)에서 발견된 동검은 기원전 12세기 무렵의 것이다. 이를 통해 기원전 1100년 고조선은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요하를 그 중심지로 단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단경식 청동검은 세형 동검으로 변해가는데 이는 후기 고조선의 대표 유물이다. 기원전 3세기 고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연나라 소왕(BC 311~BC 270)이 조선의 서방을 공격해 2000리 땅을 빼앗았다고 중국 사서는 서술한다. 이 시기 고조선의 지표유물인 세형동검 출토지의 북방한계선은 서북한이다. 기원전 4세기까지는 고조선이 요동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후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영토가 크게 축소되고 곧이어 기원전 194년 연나라 위만에게 나라를 강탈당했다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침공을 받아 역사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낙랑유물이 다량 발견된 것에 대한 해답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사라진 역사의 퍼즐을 채우는데는 문헌 이상으로 고고학이 중요하다.

한대 고분이 평안도와 황해도에 폭넓게 조성된 것으로 볼때 대대적인 사민(徙民)정책에 따라 2000여 년 전 중국인들이 한반도 북서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유입됐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정복지로 본토 인구를 이동시키는 것은 고대에 보편적으로 있었던 일이다. 이는 한나라가 자신의 백성들을 집중적으로 옮겨 살게 할 만큼 역사적으로 고조선이 그들을 괴롭혀온 강대국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낙랑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한반도를 중국화하지 못했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한민족에 흡수돼 버렸다. 그들은 우리 땅에서, 우리 조상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민족의 일원이 됐던 것이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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