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혐한류' 오해 부풀던 베이징올림픽의 기억 [최경선 칼럼]

입력 2021/07/22 00:07
수정 2021/07/22 01:20
중국관중 응원에 오해생겨
'혐한류' 괴물을 키웠던
올림픽 기억에 반성한다
도쿄에선 그런 괴물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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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나는 그곳 특파원이었다. 중국은 그때 한류의 진원지 중 하나로 꼽혔다. 많은 중국인이 한국의 경제적 발전을 배우려 했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올림픽이 시작되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한국 경기가 열릴 때마다 중국 관중은 한국의 상대팀을 죽을 둥 살 둥 응원했다. 축구, 야구, 탁구 등 종목도 가리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과 야구 경기를 하면 일본을 맹렬히 응원했고 한국이 미국과 탁구 경기를 하면 그땐 미국을 응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전화가 서울에서 다급하게 걸려왔다. "원래 이런 분위기가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며 말을 이어가려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당장 TV를 켜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TV 중계 화면를 두 눈으로 보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알고 지내던 중국인들에게 물어봐도 "이상하긴 한데…"라며 입을 다물 뿐이다.

충격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당장 뭔가를 설명해야 했다. "한국과 맞붙은 일본을 왜 중국인들이 응원하지"라는 독자들의 궁금증에 어떻게든 답을 내놓아야 했다. 얼마 전까지 중국 내 한류 열풍을 전달하던 기자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추측을 끌어모았다. 이른바 '혐한류(嫌韓流)'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중국인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국인을 질시 또는 혐오하고 있었던 듯하다'는 스토리다. 경기가 거듭되고 응원이 격렬해질수록 혐한류 스토리는 더 그럴듯해졌다.

며칠이 흐른 뒤 어느 중국 전자회사 공장장을 만나고 그의 말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응원 소동의 실체가 드러났다. "베이징은 스모그를 줄이기 위해 공장 가동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직원들은 응원부대로 차출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외국 팀끼리의 경기는 관중석이 텅 빈다. 그 자리를 메운 응원부대는 경기 룰도 모르고 심지어 어느 나라 팀인지도 모른 채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있었다. 지침은 하나뿐이었다. "응원단이 적은 팀을 응원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한국 교민과 주재원 80만명이 있었다.


또 황해를 건너 수많은 응원 인파가 몰려갔으니 어느 경기장에서든 한국 응원단은 다른 나라를 압도했다. 중국 응원부대가 한국의 상대팀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던 '혐한류'라는 괴물은 그런 응원부대의 실체가 알려진 뒤에야 사그라들었다.

도쿄올림픽이 천신만고 끝에 23일 개막한다. 중국 굴기를 자랑했던 베이징올림픽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다른 분위기다. 코로나19 사태로 개막식뿐 아니라 대부분 경기가 관중 없이 진행된다. 응원부대 탓에 오해가 생길 일은 아예 없어졌지만 뭔가 살얼음판이다. 일본인 87%가 올림픽 개최에 "불안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현지 여론도 조심스럽다. 도쿄올림픽으로 인한 일본의 경제적 손실이 25조원에 이를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도쿄올림픽선수촌 내 한국 선수단 숙소에 내걸렸던 현수막이 철거됐다.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문구가 공방 대상이 됐다. 일본 언론은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이라며 문제를 제기했고 일본 극우단체는 욱일기를 들고 선수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결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요구로 대한체육회가 현수막을 철거했다. "여러모로 이해가 안 되는 올림픽"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 방문과 한일정상회담도 무산됐다. 더 조심스러워지는 분위기다. 혐한류와 같은 괴물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허상이 눈과 귀를 가려도 선수들의 땀방울에 더 주목하는 올림픽이 되길 소망한다. '스포츠를 통해 국제평화를 증진시키자'는 올림픽 정신에도 더 천착하길 소망한다.

[최경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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