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시가 있는 월요일] 파도 앞에 서면 작아진다

입력 2021/10/2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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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은 수평선에게
파도는 파도의 기분으로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밀려가고 있었다

모래처럼 부서진 기분을 뭉쳐
파도에게 주었다
웅크린 몸을 펴 벗어 둔 신을 집어들면
맞잡은 두 손에도 계절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대로 괜찮다
바다에서 돌아와 바짓단을 펴면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파도가 내게 모래를 한 움큼 넣어 주었다

- 임수현 作 '파도의 기분' 중


바닷가에서 파도를 마주하면 나는 작아진다. 거대하고 유장한 파도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된다.

파도가 밀려오면 내 마음은 밀려나고, 파도가 밀려가면 내 마음은 다시 파도를 따라간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파도의 기분이 나의 기분이 된다. 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된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보면 파도가 내 바짓단에 추억 한 움큼을 넣어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파도 앞에 서면 나는 작아진다. 하지만 시인의 말대로 '그런대로 괜찮다'. 바다였으니까.

[허연 문화선임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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