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손현덕 칼럼] 한상(韓商) 신격호

입력 2021/10/20 00:07
고국은 그에게
레드카펫을 깔아주지 않았다
일본인 대접에 한이 맺혔지만
축적한 재산을 민족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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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도쿄올림픽을 개최한 196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남짓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가 절실했다. 이즈음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 자본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정부는 롯데 신격호 회장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스물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적수공권으로 기업을 일군 그다. 정부가 "고국에 투자하라"며 제안한 분야는 제철. 기간산업은 신 회장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는 김학렬 당시 정무수석을 만난다. 김 수석은 만년필로 '金鐵祐'(김철우)란 이름 석 자를 적은 메모지를 건네며 그를 찾아보라고 했다. 신 회장의 첫 반응은 "쇠 철, 도울 우, 그게 본명입니까"였다. 김 수석이 그를 소개한다.


시즈오카 출신으로 도쿄대학 금속공학과를 나오고 박사학위도 받은 재일동포로 우리나라 제철을 위해 태어난 분 같다고.

그렇게 해서 제철소 프로젝트를 수행한 신 회장. 그러나 제철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8개월 후 그 앞에 돌연 나타난 박태준. 제철사업은 국가가 직접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에 그동안의 연구조사 결과를 모두 넘겨줬다.

제철에 대한 좌절이 있고 나서 12년이 흐른 1978년. 정부는 여천 석유화학단지의 호남에틸렌과 호남석유화학을 민영화하기로 결정한다. 신격호는 드디어 고국에서 중화학공업을 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 입찰서를 제출한다. 당시 두 회사의 대주주는 한국종합화학.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 회사 사장을 맡은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서류를 반려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백 사장은 애써 만든 기간산업체를 일본인에게 넘길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신 회장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여권을 보여줘야만 했다. <본명 : 신격호, 일본명 : 시게미츠 다케오, 국적 : 대한민국, 본적 : 울주군>.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응어리가 느껴진 그는 훗날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했다. 결국 그는 둘 중 하나, 호남석유화학만 인수한다. 한국 중화학공업의 설계자로 불린 오원철 경제수석이 그렇게 권유했다.


신격호는 그 권유를 통보로 받아들였다.

고국은 그에게 레드카펫을 깔아주지 않았다. 일본서는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었다.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까지도 고국은 그의 마지막 꿈인 롯데월드타워를 붙잡고 있었다. 롯데가 창립 50주년을 맞은 2017년 123층 마천루의 위용이 드러나기까지는 무려 35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었다. "몇 년이 지나면 투자금을 회수할 것 같으냐"고. 신 회장의 답변은 간단했다. '회수 불가.' 고국에 대해 투자할 때 그는 껌 한 통에 목숨 건 쪼잔한 기업인이 아니었다. 셈법이 달랐다. 그는 작품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며 사업을 하는 재외동포를 한상(韓商)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격호는 한상의 원조다. 매년 그들을 고국으로 초청하는 세계한상대회가 열리는데 올해가 19회째다. 2002년 첫 한상대회가 열린 곳은 소공동 롯데호텔. 이 역시 우리 정부가 신격호에게 적자가 난 당시 반도호텔을 맡아달라며 떠안긴 것이었다. 여기서 한상들은 '한상이 지켜야 할 상도(商道) 10개항'을 발표한다. 세 번째에 "재물 축적은 정도(正道)로 하고 축적한 재산은 민족에 놓고 간다"고 적었다. 당시 호텔에 머물렀던 신격호는 조용히 행사장을 들렀다. 게스트가 오히려 호스트가 된 아이러니. 그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내년에 20주년을 맞는 세계한상대회는 공교롭게도 신격호의 고향 울산에서 열린다. 늦었지만 이번에야말로 '한상 신격호'를 불러주길 기대해 본다. 축적한 재산을 민족에 남기고 간 신격호. 적어도 그는 그 정도 대접은 받을 만한 인물이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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