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K주사기 '크리스마스의 기적' 뒤엔 풍림·삼성·중기부…31명의 특공대 [사람과 현장]

입력 2021/12/15 00:06
수정 2022/03/17 09:06
한국 제조업의 저력 알린 쾌거…K주사기 개발, 그 긴박했던 1주일
◆ Big Picture / 손현덕 주필의 사람과 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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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정부가 코로나19 백신 확보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작년 12월. 박영선 당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삼성 고위 관계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주사기를 만드는 중소기업을 접촉하는데 삼성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정부가 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세계 최대 백신 생산회사인 화이자가 주사기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삼성은 화이자가 원하는 주사기를 한국이 만들어 주면 백신 구입에 레버리지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을 한다. 화이자가 원한 건 백신을 주사하고 나서 잔량을 최소화할 수 있는 소위 최소잔여형(LDS·Low Dead Space) 주사기.

주사기는 통상 주사액을 전량 투입한 후에도 주사기 틈 사이 미세한 공간에 주사액이 남는다.


이게 '죽은 공간(Dead Space)'이다. 이 공간을 줄이면 예컨대 5회분의 백신을 6회분으로 만들 수 있다. 생산량이 20% 늘어나는 효과가 생긴다.

화이자 백신은 유리병 하나(1 vial)에 450㎕(마이크로리터, 1㎕=100만분의 1ℓ)의 주사액이 담겨 있다. 이걸 해동해 식염수 1800㎕와 섞는다. 그렇게 되면 총용량은 2250㎕. 1인당 주사량이 300㎕이니 계산상으론 7회분이나 통상의 주사기는 잔여량이 80㎕ 정도 되기 때문에 한 번에 400㎕ 정도를 뽑아야 한다. 그러면 1바이알당 5회분. 화이자의 요구는 잔여량을 25㎕로 줄일 수 있느냐였고 그걸 한국이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주사기를 만들 수 있는 중소기업이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물량을 댈 수 있을 정도의 규모와 실력이 안됐던 것이다.

삼성이 박 장관에게 요청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도와주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이 접근하면 중소기업은 몸을 사린다.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박 장관이 흔쾌히 응했다. 그 중소기업이 군산에 소재한 풍림파마텍이었다.

박 장관은 22일 이 회사 조희민 대표에게 전화를 건다. 대답은 노. "나 안해"였다. 이유는 세 가지. 첫째, 나는 무리해서 사업하지 않는다. 둘째, 그런 주사기는 보통 주사기보다 10배는 비싸다. 당장은 잘 팔릴지 모르지만 지속가능성이 없다. 셋째, 기술 유출의 위험이 있다. 박 장관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며 도와 달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다시 전화를 한다. 조 대표가 좀 누그러진 표정이다. 그러면서 이번엔 세 가지 조건을 달았다. 첫째, 정부가 일정량을 구매해 달라. 둘째, 스마트공장하려면 설비투자가 필요한데 자금 지원을 해달라. 셋째, 기술 유출 방지를 보장해 달라. 우여곡절 끝에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한 박 장관. 이제 공은 삼성과 풍림파마텍으로 넘어갔다. 이로부터 약 1주일 만에 시제품 생산. 대한민국 제조업의 실력을 입증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2020년 12월 24일 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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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30분. 군산 풍림파마텍에 이 회사 대표와 대표의 딸인 조미희 부사장, 중기부 차정훈 실장 외 3명, 식약처에서 해외 수출 인허가를 담당하는 김유미 과장, 그리고 삼성전자에서 생산과 제조 분야에 40년 가까이 잔뼈가 굵은 김종호 스마트공장지원 센터장(고문) 등이 모였다.


여기서 기적을 낳을 프로젝트의 청사진이 마련된다. 다음과 같은 합의가 도출됐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 주사기를 만드는 금형을 뜬다. 주사기는 모두 6개 부품으로 나눠지는데 각 부분 금형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 만들기 위해 구미와 광주의 중소기업을 동원한다. 여기서 금형과 사출까지 마친 뒤 12월 30일에 다시 군산에 모여 조립한다. 사출용 레진은 풍림이 구미와 광주공장으로 보낸다. 시제품 물량은 우선 500개. 양산은 일단 풍림 기존 공장에서 하는데 공간을 충분히 확보해두고 삼성이 스마트공장화를 지원한다. 식약처는 FDA 승인 일정을 최대한 단축시킬 수 있도록 지원한다.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허가 문제는 중기부가 해결한다. 이런 것들이었다.

이 모임이 있기 이틀 전인 12월 22일. 프로젝트를 진행할 총 31명의 멤버가 확정됐고 이들이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할 단톡방이 개설된다. 김종호 센터장은 삼성전자 협력업체인 윤일정밀 오응택 대표와 접촉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진행될 주사기 프로젝트에 대해 귀띔해 준다. 그는 오 대표에게 "대한민국의 금형기술을 세계에 과시할 기회"라며 "한번 도전해 보자"고 권한다. 1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오 대표가 답한다. 직원 72명을 둔 중소 금형회사 윤일정밀. 이 회사의 모토는 "우리는 핑계보다 방법을 찾는다"이다. 주사기 6개 부품 중 외통을 뺀 5개의 금형은 윤일의 몫이었다. 김 센터장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군산 공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2020년 12월 25일 D-5


금형을 만들려면 도면이 필요하다. 정확한 주사기의 도면이 나와야 그걸 토대로 틀을 만든다. 만약 금형을 만들어 놓고 나서 변경에 들어가면 30일 정도는 날아간다. 정확한 주사기 설계도는 없었다. 풍림의 윤종덕 연구소장이 3차원 모델링 작업에 들어간다. 이 결과를 삼성과 윤일 측에 전달해 줘야 한다. 크리스마스 휴일 내내 일하고 밤 12시가 돼서야 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베스트는 아니었다.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화이자가 원하는 건 잔류량 25㎕이지만 그걸 달성하려면 목표는 더 낮게 잡아야 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흡자(Plunger). 주사액을 끝까지 밀어내는 까만 고무 부분이다. 이걸 통상 둥그렇게 하는데 그게 바늘 밑부분과 빈틈없이 밀착하면 이론적으로는 바늘 안에만 약이 남게 된다. 김 센터장은 잔여량 제로를 목표로 하자고 밀어붙였다. 바늘에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비워보자는, 사실상 불가능에의 도전이었다.

2020년 12월 26일 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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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을 보내는 마지막 주말. 오늘은 설계를 확정하고 그걸로 금형 가공에 착수해야 한다.


풍림이 기본적 콘셉트를 제시했다. 소위 3단 콘 구조 방식. 흡자 부분을 아이스크림콘처럼 만들어 빈 공간을 줄이겠다는 아이디어였다. 풍림이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미세한 틈에 생기는 잔여량은 4.91㎕. 어쩔 수 없이 바늘에 남는 양이 3.46㎕. 합쳐서 8.37㎕. 이제 압력 문제가 남는다. 압력을 최소화해야 부드럽게 주사액이 들어갈 수 있고 잔류량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미 윤일정밀의 오 대표는 설계를 받아 금형작업에 들어간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3일. 외통은 삼성 광주 금형공장에서 하니 나머지 5개는 본인의 몫이었다. 이날 풍림은 시제품을 만들 레진 수송을 완료했다. 광주와 구미 공장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

2020년 12월 27일 D-3


프로젝트 팀원 31명이 모여 있는 단톡방. 방장인 김종호 센터장이 단톡방 슬로건을 지었다. '세상에 없는 주사기를 만들자'였다. 주사기 제작의 큰 틀은 정해졌다. 구미와 광주에선 설계대로 금형을 짜고 풍림에서 보내온 레진을 넣어 시제품을 만들어 내면 된다. 금형제작 공정 엑셀파일이 전 팀원에게 공유된다. 6개 부품별로 제작 일정을 적고 진행 상황에 따라 오렌지색과 그린색으로 표시한 표였다. 독일병정식 같은 이런 제조에 익숙지 않은 풍림의 조미희 부사장은 표에 나와 있는 '배럴 29 22'가 뭐냐고 묻는다. 외통(barrel)은 29일 22시에 사출을 완료한다는 공장의 언어였다.

2020년 12월 28일 D-2


금형은 뿌리산업 중에서도 뿌리다. 휴대폰이든 냉장고든, 심지어 마스크든 진단키트든 10개 이상 균일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금형이 필요하다. 금형기업을 가보면 그야말로 공장 냄새가 난다. 잔근육이 발달된 권투선수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쇠붙이를 깎고, 드릴로 구멍 내면서 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한 가공이 이뤄진다. 설비를 만드는 건 세계에서 독일이 1등이지만 그 설비를 이용해 금형을 만드는 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윤일정밀 오응택 대표는 27일부터 비상근무에 들어간다. 대부분 직원들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반납했다. 졸업 후 줄곧 공장에서만 일한 올해 65세 기업인. 외환위기 때 잘나가던 삼성전자를 뛰쳐나와 창업에 나섰다. 현재 중국, 베트남, 인도에까지 공장을 두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금형은 설비에서 품질이 결정되나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손끝 정성이 사라지면 결과물은 엉망이 된다.

오 대표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당부한다. "이제 공은 윤일에 넘어왔다. 우리가 실패하면 이 프로젝트는 실패한다. 52시간 근무, 이번 일엔 그런 건 없다. 나는 법을 무시할 것이다. 고발해도 좋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하자. 이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일이다"라고.

2020년 12월 29일 D-1


주말엔 겨울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그래 이런 날이 일하기는 좋다. 구미와 광주공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쇠를 깎는 기계음만 웅웅 거렸다. 기적같이 2개 공장에서 모두 6개 부품의 금형작업이 끝났다. 풍림에서 받은 레진을 넣어 시험사출에 들어간다. 김종호 센터장은 최대한 많이 뽑아달라고 요구한다. 최소 50개 정도는 돼야 어느 정도 테스트를 할 수 있고 양산에 들어갈 수 있을지 판단이 서게 된다. 풍림은 이 제품이 도착하면 조립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고 외통에 눈금 작업도 해야 한다. 모두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할 사항이었다. 식약처는 식약처대로, 중기부는 중기부대로 준비할 일들이 있었다. 올 스탠바이(All Stand By).

2020년 12월 30일 D-day


군산에 다시 31명의 팀원들이 모였다. 최고조의 긴장이 흐른다. 눈금 인쇄도 끝났고 조립만 하면 된다. 그러고는 완성된 제품에 하자가 없는지 검수를 마친다. 결과가 궁금했다. 그동안 별별 아이디어 다 짜내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든 주사기. 과연 잔여량은 얼마나 될까? 세 가지 결과 값이 나왔다. 8㎕, 10㎕, 12㎕. 모두 다 화이자가 요구하는 수준의 절반 이하였다. 주사기 팀은 이 과정을 동영상으로 만들고, 주사기 샘플을 사진 찍어 화이자로 보냈다. 실제 제품은 가장 빨리 도착하는 배달서비스로 보냈다. 화이자 책임자는 동영상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이냐고 되물었다.

사실 주사기 프로젝트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시제품을 만드는 것과 양산은 완전히 별개다. 이 팀들은 시제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양산 시설 준비도 같이 했다. 덩치 큰 설비를 줄이고 사물인터넷 시스템을 깔았다. 비효율적인 라인도 재정리했다. 이 모든 걸 끝내고 단 한 달 만에 대량생산 미션을 완수한다. 2021년 새해 들어 단톡방 슬로건을 바꿨다. "LDS 주사기는 타이밍 싸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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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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