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레저홀릭] 이등병의 추억

입력 2022/01/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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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 익사이팅 테마열차'(매경출판 펴냄)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만큼 테마열차 전성시대다. 특급호텔 뺨치는 열차 객실에서 잠까지 청하는, 2박3일 일정의 300만원짜리 해랑이라는 열차가 있는가 하면, 열차 안에서 족욕까지 받을 수 있는 서해금빛열차도 있다. 협곡 사이를 지난다고 V라는 애칭이 붙은 협곡열차, 충청권부터 강원권까지를 O자로 한 바퀴 휘도는 O트레인, 전국 장터만 도는 장터열차, 와인열차, 시네마열차까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여행 전문인 본 기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열차는 뭐니 뭐니 해도 비둘기호다. MZ세대에게야 낯설겠지만, 소위 '아재'들에게는 그야말로 향수를 일으키는 열차다. 잠깐 역사를 보자. 비둘기호가 전면에 등장한 건 1984년이다.


풍년·통일·증산·협동·부흥·갈매기까지, 중구난방으로 불렸던 열차들이 선로를 누비던 시절이다. 이게 정확히 4계급으로 정리된 해가 바로 1984년이다. 이때부터 마치 병사 계급처럼, 우등·특급·보급·보통(완행)의 단계에 따라 새마을·무궁화·통일·비둘기호로 나뉘게 된 거다.

완행 비둘기호는 군대로 치면 이등병 같은 존재였다. 최하위(?) 등급답게 비둘기호는 묵묵히 움직였다. 군소리 한번 없이, 역 비슷한 게 있으면 모조리 정차하며 여행의 추억을 만들어 냈다.

버티고 버텼던 비둘기호는 결국 1998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당연히, 먼지 쌓인 본 기자의 기차여행 추억도 1998년을 기점으로 뭉텅 잘려나갔다. 뜬금없이 비둘기호 얘기를 꺼낸 건 이등병의 운명이 최근 논란이 되면서다. 민관군합동위원회가 병사 계급 체계를 종전 4단계에서 3단계로 단순화하는 방안을 국방부에 권고하면서 이등병제 폐지를 건의한 거다. 세상에, 1948년에 군이 창설된 이후 73년간 존재했던 '이등병' 계급이 사라지다니. 이 소식은 비둘기호 증발만큼이나 충격적이다. 이등병은 비둘기호 같은 추억의 존재다.


자유만 알던 청춘에게 계급과 위계질서라는 게 처음 박히는 군생활, 막막했던 초기 군생활 애환이 이 단어에 녹아 있다.

말랑말랑한 감성을 건드리는 가요사(史)에도 이등병 스토리는 약방의 감초다. 이등병이 노랫말로 등장하는 건 1958년 고 박춘석 작곡가의 '삼팔선의 봄'에서다. 이후 김광석은 '이등병의 편지'라고 아예 제목에 이 단어를 박아 넣는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한때 '방위'라 불렸던 단기사병 근무임에도, 괜히 현역을 흉내 내며 폼 잡고 불렀던 노래도 다 이등병류다. 이등병제가 사라지면 '입영열차 안에서'(1990년), '훈련소로 가는 길'(1995년), '나 군대 간다'(2016년)에 나오는 '이등병'들은 다 어디로 갈지.

이등병을 주제로 밀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는 숫제 난리가 날 것 같다. 파주시는 광탄면 신산리 일대에 내년 말까지 약 4만㎡ 규모로 이등병 마을을 조성 중이다. '이등병의 편지'를 만든 작곡가 김현성 씨 고향이 파주인 점에 착안한 거다. 대구 김광석골목처럼 마을 입구에는 '통기타 랜드마크'도 세워진다. 위문편지들이 전시될 이등병 우체국과 이등병 이발소, 입영열차 모형이 놓일 소공원도 들어선다. 사라질 이등병 운명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작대기 하나의 추억은 이등병 마을의 부활과 함께, 이제 다시 시작인데.

[신익수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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