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허연의 책과 지성] 1인자보다 대인배였던 2인자

입력 2022/01/15 00:07
저우언라이 (1898~1976)

"이념이 중하다 해도 부자의 연을 끊을 순 없다."
대인의 자세로 현대사 풍미한 중국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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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가 쓴 '중국 이야기'에 보면 정치가 저우언라이(周恩來)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부분이 있다.

"마오쩌둥은 어떤 모임도 지배했고, 저우언라이는 모임을 꽉 채웠다. 마오의 열정은 반대를 압도하기 위해 쓰였고, 저우의 지성은 반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오는 냉소적이었지만 저우는 다가갔다. 마오는 역사를 빨리 끌고 가려고 했고, 저우는 역사의 흐름을 이용하는 것에 만족했다."

저우는 탁월한 2인자였다. 사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두고 2인자라기보다는 '대인(大人)'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저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국무원 총리를 지내며 중국 근현대사의 현장을 지켰다. 그는 숱한 평지풍파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누구의 미움도 받지 않았다.


대중도 주변 정치세력도 그를 좋아했고, 심지어 외국에서도 그를 인정했다.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쿠르트 발트하임은 저우가 죽자 유엔에 조기를 계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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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의 삶이 담긴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니 대인의 풍모가 드러나는 일화들이 많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자금성과 포탈라궁 등 문화유산을 불 지르려 했을 때 그것을 막아선 것도 저우였다. 중국 공산당이 청나라 황족들을 처단하려 했을 때 경비병을 보내 그들을 보호한 것도 저우였다.

천두슈(陳獨秀) 사건도 유명한 일화다.

중국 공산당 창시자인 사상가 천두슈는 1930년 무렵 노선을 바꿔 공산당을 탈당하고 트로츠키주의자가 된다. '1국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세계혁명 운운하는 트로츠키주의는 눈엣가시였다. 결국 천두슈는 중국 공산당의 공적이 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천두슈가 감옥에서 나와 병석에 있을 때 저우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병문안했고 치료비를 보내줬다. 옛정을 지킨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58년 유명 번역가이자 음악가인 푸레이의 아들이 유럽에 유학을 갔다가 영국으로 망명한 일이 있었다. 공산당은 푸레이와 아들의 서신 왕래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푸레이는 저우에게 편지만이라도 주고받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청을 들은 저우는 "이념이 아무리 중요해도 부자지간의 연을 끊을 수는 없다"며 서신 왕래를 허락한다.

저우는 지한파였다. 난카이대 시절 안중근 소재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 황푸군관학교 때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1960년대 중국 사회과학원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했을 때 이를 중단시키고, 항의하는 북한 측 파견단에 사과한 것도 저우였다.

여자 문제로 시끄러웠던 다른 중국 지도자들과는 달리 저우는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덩잉차오와 모범적인 부부로 살았다.

저우가 보여준 일화들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된다. 조화롭고 큰 지도자가 그리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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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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