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매경포럼] 대통령의 약속

입력 2022/01/25 00:07
대선 중립 말 따로 행동 따로
선관위원 비상식 무리수 인사
공무원 항명 탓 무산 망신살
낙하산·차등의결권도 공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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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편향 논란이 컸던 조해주 선관위 상임위원 사퇴는 상식의 승리다. 조 위원은 문재인 대선캠프 특보 출신으로 3년 전 임명 때부터 불공정 시비가 많았다. 조 위원을 포함해 위원 8명 중 1명을 빼곤 모두 친여 성향인 선관위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작년 4·7 재보선 땐 '내로남불' '보궐선거는 왜 하나요'라는 표현조차 막아 편파 시비를 자초했다. 이런데도 대통령이 임기 만료 땐 무조건 퇴임하는 불문율까지 무시한 채 연임을 밀어붙였다. '선거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무색하게 하는 언행불일치 자기부정이다. 이런 비상식 무리수 인사를 '영혼이 있는' 선관위 공무원 2900명이 막아냈다. 대통령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공무원들이 집단항명으로 거부한 것이다. 대통령의 권위가 무너졌다. 이런 망신이 없다.


예삿일이 아닌데도 어물쩍 넘어가려는 청와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뿐만 아니다. 여당 대선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이 요구한 대선 직전 추경도 바로 수용했다. 전무후무한 1월 추경은 금권선거 획책이라는 비판이 거센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그 무심함이 놀랍다. 3월 대선 직전 나랏돈 퍼주기 추경은 누가 봐도 여당 후보 밀어주기다. 선거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와 법무부 장관은 친문 여당 의원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장관 교체와 중립내각 요구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청와대의 선거중립과 통합 약속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서해상에서 북한군 총격으로 숨진 공무원의 고3 아들 이 모군에게 한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재작년 10월 이군에게 "진실 규명을 직접 챙기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후 1년4개월간 유족들의 피눈물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법원까지 나서 유족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라고 했지만 청와대는 '한반도 평화 관련 사안'을 들먹이며 거부했다. 아예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해 30년간 비공개하겠다고 한다.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게 가장 큰 헌법적 책무인 대통령이 유족의 분통함보다 김정은 정권 심기를 우선시한다는 질책이 나올 만하다.


왜 부친이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됐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 채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이군을 나라가 매몰차게 외면했다. 국가의 책임 방기다. 이군은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다시 한번 읽어보시고 제 분노를 기억하시길 바란다'는 편지를 "국민 안전은 국가 무한책임"이라던 대통령에게 보냈다. 깊은 좌절과 배신감이 묻어난다.

대통령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벤처인과 기업인들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대통령은 벤처업계 숙원인 차등의결권 입법과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한 반도체특별법을 수차례 확약했다. 하지만 차등의결권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반도체특별법은 재계 핵심 요구가 다 빠진 알맹이 없는 껍데기 법으로 전락했다. 약속을 못 지켰으면 사과하고 이해를 구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다. 낙하산 보은인사 악습을 끊겠다는 약속도 공수표가 된 지 오래다. 임기 내내 제 식구 챙기기에 몰두하더니 임기 100여 일 남은 정권의 무차별 보은 알박기 인사가 전방위적이다. 차기 정권 배려 차원에서 임기 말 인사를 자제하는 관행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국민 눈치를 보는 시늉조차 없다.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하라 하고, 영혼 있는 공직자가 되라더니 말뿐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니 무자비한 핍박으로 돌아왔다. 월성원전 불법 조기 폐쇄를 수사하고 감사한 사람들은 보복인사를 당했다. 불의한 일이다. 인권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권이 공수처 민간인 사찰엔 입을 다물어버렸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깨라고 있는 게 아니다. 특히 대통령의 약속과 말의 무게가 이렇게 가벼워서는 안 된다. 5년 전 취임사 때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그 약속부터 지키지 않았다.

[박봉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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