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손현덕 칼럼] 거룩한 몸부림

입력 2022/02/23 00:07
수정 2022/02/23 08:42
'도덕적우위로 日 끌고가자'
정치 지도자에게 보내는
김황식 전총리의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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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지목한 '거룩한 몸부림'. 권력 추구를 넘어 국가 운영과 국익을 생각하는 사명감. 그 과정에서 본인의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는 희생정신. 독일의 역대 총리를 연구해온 김 전 총리는 지난달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그 단상을 밝혔다. 영토를 포기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핵 배치를 주장한 헬무트 슈미트의 '이중결정'이 오늘의 독일을 유럽의 강자로 만들었으며,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하르츠 개혁은 독일을 유럽의 병자에서 탈출시켰다. 그걸 그는 거룩한 몸부림이라고 했다.

여론과는 척을 지더라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다수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상대 당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모습을 독일에서 보았고 이런 게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요구된다고 일침을 가했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그 '거룩한 몸부림'을 보일 대목이 하나 있다. 임기가 거의 다 된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것이며 2주 후면 탄생할 새 대통령 당선자에게는 첫 도전일 것이다. 바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다. "사도광산이 터진 게 엊그제인데 말이 되는 소리냐"고 무디고 엉뚱한 현실감각을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962년 텍사스 라이스대학 연설처럼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를 지닌다.

사도광산뿐만이 아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쉬운 곳이 없다. 곳곳이 지뢰밭이다.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쳇바퀴를 돌고 있으며 강제징용 재판과 보상은 악재 중 악재일 것이다. 일본이 주도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둘러싸고 불거질 후쿠시마 수산물 논란은 시한폭탄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한미동맹을 견고하게 다지는 입구(入口)이기도 하다. 이 난제의 해결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1년 전쯤 한일 순방을 앞두고 "한일관계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하더니 지난주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일 외무장관회담에서도 재차 이 점을 강조했다.


사실 미국의 속내를 훨씬 더 내밀하게 알 수 있는 단서는 최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대담에서 국무부의 마크 램버트 부차관보가 한 발언이다. 한국과 일본을 담당하는 그는 "분명한 것은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한·미·일 모두 덜 안전해질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1주일 전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 전우회가 공동 주최한 화상회의에서도 거의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같은 소리를 했다. 미국 측에서 보면 한일 관계의 악화는 인도 태평양 전략 수행의 최대 걸림돌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나 차기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푸는 용기와 결단을 주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 전 총리가 최근 일간지 인터뷰에서 말한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일본은 독일처럼 사죄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 한계를 우리가 인정하고 실리와 명분을 찾자"고 제안한다. 김 전 총리는 "2차 대전 후 피해국 프랑스는 가해국인 독일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며 "우리도 도덕적 우위에 서서 일본을 끌고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게 바로 거룩한 몸부림일 것이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해설을 맡은 이상화 씨의 일본 동료에 대한 우정이 화제다. 평창에서 자신을 누르고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 나오가 스피드스케이팅 500m 경기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자 이상화는 절규하듯 "아 포기하지 마요. 끝까지!"라고 외쳤다. 고다이라가 17위로 경기를 마치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런 이상화를 고다이라가 찾아가 인사를 건넨다. "잘 지냈어? 보고 싶었다"며. 한국과 일본의 정치가 스포츠의 10분의 1만 됐어도 한일 관계는 오늘날 이 지경까지는 안됐을 것이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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