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VIEW POINT] 대기업투자, 자율에 맡겨야

입력 2022/05/2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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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검사를 당한 기분이겠네요."

지난 24일 600조원에 가까운 재계의 투자 계획 발표를 지켜본 한 원로 기업인의 얘기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재계가 투자와 고용 계획을 내놓는 것이 공식 이벤트가 되고 있다. 미래 먹거리 발굴에 얼마, 기존 산업 경쟁력 강화에 얼마,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해 얼마, 청년 취업난 해소를 위해 몇 만명. 공란에 채워지는 숫자만 조금씩 다를 뿐 형식도 내용도 매년 비슷하다. 지난해 발표 내용에 숫자만 고친 '복붙(복사하고 붙여넣기)' 수준의 보도자료를 새로운 것인 양 배포한 기업도 있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대기업이 4~5년간의 투자 계획을 경쟁하듯 동시다발적으로 내놓는 곳은 없다. 실제로 투자를 집행하는 시점에 맞춰서 그때그때 공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회사의 경우 공시 제도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래야만 기업에 투자한 주주나 각종 이해관계자들이 투자의 세부 내역을 확인하고 기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고용은 더욱 그러하다. 채용과 해고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미국의 경우 장기 채용 계획을 내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신 투자를 할 경우, 이로 인해 새롭게 생기는 일자리 숫자만 얘기한다. 뜬구름 잡는 몇 만명 고용보다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나라 예산만큼의 투자 계획을 재계가 발표했지만 어느 회사가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겠다는 식의 세부적 내용은 없다. 이렇다 보니 실제로 투자가 집행됐는지, 또는 정확하게 몇 명이나 채용을 했는지 등을 나중에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재계도 이행 실적을 구태여 발표하지 않는다.


물론 재계가 이렇게 공허한 내용을 발표하는 속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음달 1일에는 지방선거도 있다. 기업이 투자와 고용으로 바람잡이를 해줘야 여당 선거에 도움이 된다. 맹탕일 수도 있지만 일단 숙제를 해서 제출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기업의 불쌍한 처지다. 지난 주말 한국을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 일정의 시작과 끝이 기업이어서 화제가 됐다. 그만큼 우리 기업들이 대한민국의 전략자산 수준으로 위상이 업그레이드됐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우리 정치와 위정자들도 국격을 높여준 기업을 '존중'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산업부 = 이승훈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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