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칼럼

대한민국 반도체 영웅들 [손현덕 칼럼]

입력 2022/06/01 00:07
수정 2022/06/01 00:11
윤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때
40년 전 반도체협력을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에게
거저 기술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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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2월이었다.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에 파견 나가 있던 류병일 사원에게 전갈이 왔다. 다음 날 정장을 하고 삼성 본관으로 오라는 지시였다. 이유는 서울에 도착해서야 알게 됐다. 과장 승진, 그리고 부천 반도체 공정개발실 팀장으로 가라는 인사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본인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짐작조차 못했다. 64K D램 개발이었다. 얼마 후 전원 신규사업팀으로 차출된다.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다음해 3월 초 '기술독립군' 발대식을 거행했다. 반도체의 산증인인 김광호-이윤우로 라인업이 짜였다. 정예부대 107명에게 첫 지시가 떨어진다. 엉뚱했다. 무박 2일로 진행되는 총거리 64㎞ 행군이었다. 낙오자는 독립군에서 제외한다는 조교의 지침이 하달됐다. 단순히 걷지만 않았다.


야밤에 연못에서 고기도 잡아야 했고, 묘비 탁본도 떠야 했다. 조회시간에 조별로 반도체 10계명을 큰소리로 외쳤다. 틀리면 배식 금지. '안큰일 지유겸 서무철향.' 삼삼사 시조 운율로 외웠다. '안'은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일'은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져라. 이런 거였다.

자체 기술이 있을 리 없다. 선생은 일본의 샤프와 미국의 마이크론이었다. 샤프로부턴 식각, 확산, 박막 등 단위 공정을, 마이크론으로부터는 검사, 설계 등 제작과 관련된 핵심 기술을 얻어와야 했다. 지난달 20일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맞은 윤석열 대통령이 바로 이 64K 반도체를 콕 집어 말했다. 윤 대통령은 "마이크론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한미 동맹의 오랜 역사처럼 한미 반도체 협력의 역사 또한 매우 깊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긴 하나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마이크론은 삼성에 결코 기술을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마이크론이 우리의 연수단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만 해도 기대에 부풀었다. 연수단 1진 8명이 서울을 출발해 새너제이 공항에 도착한 1983년 8월 20일. 난생처음 맛보는 캘리포니아 와인에 흠뻑 취했다.


연수단은 마이크론이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걸고 마중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황무지 같은 벌판을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아이다호 시골 동네는 썰렁했다. 문전박대였다. "두 명만 남아라. 나머지는 돌아가라." 그리고 연수 기간도 단축됐다.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50여 명이 참여할 거란 야무진 연수계획은 불과 40일 만에 끝났다. 류 과장이 마지막 단원이었다. 포토마스크 세트 정도만 챙겨 들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실 대한민국 반도체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각오로 밤샘 작업에 매달린다. 악전고투 속에 살아남은 웨이퍼는 검사실로 올라가 테스트를 거친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전문용어를 쓰자면 조이스틱을 잡고 칩 하나씩 검사에 들어가는데 모니터에 뜨는 건 'All Bad' 시그널이었다. 치명적 불량이다. 그때마다 이들은 10계명을 외쳤다. 그러다가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곤두서는 충격에 휩싸인 건 11월 10일 새벽 2시. 불량이긴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조이스틱을 움직이던 손에 경련이 일었다. 처음으로 목격한 희망의 불꽃. 한국 반도체의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물론 64K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64K가 없었다면 그 뒤 대한민국이 일본을 처음으로 누른 256M D램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자랑스러운 삼성인' 상의 전신은 삼성그룹 기술대상. 그 첫 번째 수상자가 바로 64K D램 팀이다. 영웅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승규, 류병일, 김오현, 이원식, 윤여훈, 고영범, 김상열, 한문호, 최하섭, 임천희, 박영순, 김정곤.

윤 대통령이 그날 환영사에서 대한민국 반도체의 영웅들에 대한 격려 한마디 안 한 건 못내 아쉽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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